■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마당엔 붉은 고추가 널리고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수가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낸다.
희뿌연 은하수가 흐르고
어느새 내 곁에 ‘윤동주’님이
찾아와 나직이 별을 헨다."

깜깜한 새벽녘 한기를 느끼며 깨어선 방방이 열려있는 창문을 닫는다. 전기장판을 켜고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는다. 처서(處暑)를 지나자마자 그 무더웠던 여름이 갑자기 변했다. 이제 밤에는 좀 두터운 차렵이불을 내어놓아야겠다. 옷도 소매가 긴 것으로 꺼내야겠다. 한낮의 뜨거움도 습기가 가셔서 한결 뽀송뽀송하다. 가을햇볕과 노인 건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데, 이불 빨래며 여름 옷, 가을 옷 장롱정리하고 햇볕에 잘 널어 말려야겠다.

요즘은 햇볕이 너무 좋아 베란다에 고추를 따다 말린다. 태양초를 만드느라 자주 만지고 뒤집어 주다보니 따가운 햇발에 고추 물기가 가시고 마르면서 그 속까지 얇고 발갛게 투명해진다. 푸른 하늘에 내 걸린 하얀 이불빨래가 바람에 온 몸을 흔들며 눈이 부시다.

갈 것은 가는구나, 가만히 있어도 가는구나. 여름날 무더위를 탓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이 서늘한 바람이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더위에 지쳐 뾰족뾰족해진 성질도 찬바람에 모서리가 무뎌지며 나를 철들게 한다. 순식간에 달라진 기온 하강, 계절의 변화에 창조주의 섭리를 깨닫는다.
가수 김광석의 「서른 즈음」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점점 더 멀어져 간다/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하루하루와 이별하며 사는 것이라고.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나날인데 그것이 결국 변해버렸다고, 달라지고 있다고, 잊혀지고 있다고 말한다.
뜨겁고 낭랑한 볕에 나를 말리고 있다. 화사한 봄빛에 꾸었던 꿈이, 왕성한 여름에 차올랐다가 쓸쓸하게 스러지는 슬픔과 상처난 욕심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따끈한 햇볕에 가만히 말리고 있다. 시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처럼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다달은 까마귀같이’ 말라 무채색 낙엽으로 가라앉는다. 뼛속까지 말라 가볍게 부서지고 작은 바람에도 멀리 날아간다.

집집마다 마당엔 붉은 고추가 널리고,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수가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낸다. 어스름 저녁은 어둠을 툭툭 털며 처마 밑으로 사라지고, 가을 밤 ‘찌르르르’ 풀벌레 울면 가을 별들이 제자리에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본다. 희뿌옇게 흐르는 은하수 사이에 거문고자리, 백조자리... 어느새 내 곁에 ‘윤동주’님이 찾아와 나직이 별을 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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