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65)

▲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의 한 장면.

"일부 ‘신여성’들의
소비․향락 풍조 확산…
이는 조선사회에
놀라운 자극제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복을 입은 사람은 서광범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말기의 개화파 정치가다. 김옥균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있을 때였다.
1884년, 조선에 오기위해 일본에서 기다리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들과 만난다. 언더우드는 이들 중 인물이 가장 좋은 서광범에게 양복을 입어보도록 권했고, 그의 권유에 따라 요코하마에서 양복을 맞춰 입으면서 그는 이 나라 ‘최초의 양복쟁이’가 됐다. 이렇게 시작된 양복이 1896년에는 육군복이 양복으로 바뀌었고, 1899년 외교관을 거쳐 1900년에 문관복도 양복에 자리를 내주면서 양복화가 진행됐다. 물론 모든 게 일본의 입김으로 이뤄졌다.

1899년 양장을 한 윤고려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장 여성으로 꼽힌다. 윤고려의 아버지 김윤정은 일찍이 미국 유학을 하고, 외교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일찍 서양문물을 접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한 뒤 윤치오와 결혼하면서 미국과 일본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김씨에서 윤고려가 됐다. 국제적 감각을 가진 인재로서 학교를 세우고 개화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요절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은 친일파였다. 

윤고려의 뒤를 이어 이화학당에서 초기에 교육을 받고 이 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와, 결혼한 여성으로서 자비유학을 했던 신여성 하란사 등이 간헐적으로 양장을 했을 뿐 대부분의 여성들은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다만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고 짧은 통치마를 입어 한복의 기능성을 높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젊은 여성들은 바로 이런 개량한복차림으로 만세운동에 나섰다.
1925년경부터 서양에서 ‘발칙한’ 유행이 고개를 들었다. 스커트 길이가 무릎까지 올라오고 머리를 짧게 자른 단발머리 스타일(Flapper style)이 휘몰아쳤다.

새로운 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성적 규범의 변화 등 많은 변화의 바람이 일 때 생긴 유행이었다. 세계 대경제공황이 몰려오면서 1930년대에는 길고 우아한 옷들로 유행이 바뀌었다. 이 무렵 조선은 일제의 강점기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경성에서는 남촌의 본정(本町:충무로)을 중심으로 일부 ‘신여성’들의 소비와 향락의 풍조가 확산됐다. 이는 전통적인 조선사회에 놀라운 자극제가 됐다.

이 무렵의 신여성을 사람들은 모던 걸(modern girl)이라 불렀다. 그러나 경성의 ‘모던 걸’은 ‘못된 걸’ 또는 ‘나쁜 여자’로 인식됐다. 서구적 외양과 취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성적 질서를 위반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지만, 그 밑바닥에 일본 세력의 주도하에 형성된 서양의 문화가 일본처럼 미웠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새로운 서구문화를 누리고 즐기는 사람들은 친일 세력의 앞잡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뜻있는 사람들은 신여성이라 할지라도 한복을 고집하고 서양식을 따르지 않았다. 저항이었다.
여기 저기 문을 닫는 작금의 유니클로 ‘수난’을 보면서 ‘침략시대’에 저항하던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뜻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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