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 영화 <노예 12년> 중 한 장면.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그 단어가 기억에서
불쑥 솟아났다..."

장마답지 않은 장마라 종일 흐리다가 몇 방울 흩뿌리기를 반복하다보니 집안은 온통 습기로 눅진하다. 하루에 두어 번씩은 기본으로 샤워를 해도 이 불쾌한 ‘끈적지수’는 내려가질 않는다. 허리 아프다는 핑계로 선풍기 하나 끼고 뒹굴며 제법 두툼한 책 한권을 골랐다. ‘BELOVED’(사랑받은 사람). 언뜻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그 단어가 기억에서 불쑥 솟아났다.

1974년, 나는 사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중학교 국어교사로 발령이 났다. 그때 사귀던 지금의 남편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서울에서 같이 학교를 다니다 부산으로 훌쩍 내려와 직장인이 되고 보니, 지금과는 달리 자주 편지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갓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새내기 6명이 교창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방과 후 함께 몰려다니며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삶을 나누며 지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시시콜콜한 연애사까지 다 아는 터라 남편의 편지가 오면 친구들이 먼저 알고 공개하라고 난리였다. 그 중에 가끔 남편이 영문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영어담당 친구가 이것은 자기가 해석을 해 주는 게 맞노라며 편지를 가져가선 ‘love’라는 단어마다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편지의 서두는 ‘To my beloved’로 시작해서 ‘Beloved’로 끝났었다.

나는 그때의 추억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웬걸. 이 소설은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미국의 흑인여성작가로 인종과 성적차별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발해온 ‘토니 모리슨’의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이듬해 흑인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글은 1856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실제로 일어났던 ‘마가렛 가너’ 사건을 소설화 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흑인노예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삶, 성폭력, 구타, 끊임없는 일,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삶을 짓밟고 흑인여자의 젖을 짜서 백인아이의 간식을 만드는 잔혹하고 끔찍하게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고통을 견디다 못한 흑인여자 노예가 가족과 함께 탈출해 켄터키주를 나와 천신만고 끝에 오하이오 신시내티로 달아났으나 노예사냥꾼의 포위망을 좁혀오자 갖고 있던 톱으로 등에 업은 아이를 목을 베어 죽인다. 이 아이가 자라 자기의 삶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므로 아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죽이는 것이었다.

마가렛 가너는 체포돼 재판을 받는데, 캔터키주의 도망노예법은 노예의 자식도 주인의 재산인데 죽임으로 재산절도와 파손죄로 처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고, 마가렛 가너를 변호하는 변호사는 오하이오주의 법에 따라 사람을 죽였으니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주에 걸친 긴 재판에서 결국 판사는 켄터키주의 연방법에 손을 들어줘 재물손괴죄로 마가렛 가너는 주인에게 끌려가게 됐다.

차별과 비인간적인 흑인노예제도는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마가렛 가너가 죽이려 했던 것은 자기 아이가 아니라 자신을 친자 살해범으로 만든 노예제도였을 것이다. 읽고도 아직 다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남았지만 오늘 하루 무더위를 잘 따돌리고 어지러운 머리를 들고 기지개를 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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