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자연의 사소한 것까지
깊이 관찰하는 것은
인생연극의 맨 앞자리…

유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이미 집마당에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큰 나무들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달다보니 드나드는 길이나 마당이 아주 비좁아졌다. 마당입구를 지키는 세 그루의 자두나무의 열매가 굵어지면서 그 무게로 가지가 축축 늘어지고 잇대 선 매실도 가지가 내려앉아 가지를 피해서 우리 차를 대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해서 농원 간판이 있는 비탈 아랫길 입구에 차량 진입하지 말기를 부탁하는 팻말을 써 붙였다. 택배 차량이나 가스배달트럭이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꺾어버린 일 때문이다.

올해도 농사의 시작은 간단했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고 한 달은 봄방학이었다. 5월 중순까지는 채소도 풀도 나무도 그다지 손볼 게 없다. 이때는 제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흙을 뚫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유월도 중순을 넘기면 마을에선 첫 수확으로 하지감자를 캐느라 여기저기 분주하다. 우리도 유월에 들어서면서 첫 열매를 따는데, 그 처음이 오디이고, 다음 앵두이고 보리수이고 요새는 매실이다. 늘어진 매실 가지를 베어서 매실을 따고 마당을 넓히고. 벌레 먹은 자두가 발갛게 떨어진 걸 보니 장마 때를 앞서 곧 자두도 따야할 것 같다. 배나무 봉지 싸기도 거의 다 돼가지만 어느새 농원의 잡풀은 허리까지 차오르고 우리의 풀을 뽑는 노동이 시작된다.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에 반팔 반바지를 입었다간 풀독이 오르고 풀벌레의 밥이 된다. 긴바지에 팔토시는 기본이고 썬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써서 완전무장을 한다.

꽃받침을 뒤집어 쓴 방아다리 고추는 미리 떼어주고 고추밭 가장자리부터 풀을 맨다. 양배추 벌레가 잎을 갉기 시작했는데, 벌레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대파 곁에 나란히 숨어 있는 바랭이풀은 얼핏 보면 대파와 비슷하지만 낸 눈을 속이진 못하고 뽑혀버린다. 고라니가 지나가며 밟은 쓰러진 파는 다시 일어서고 있다. 쑥갓 줄기 꺾은 자리엔 새순이 돋아 가지를 치고, 밭이랑마다 비름나물이 차올라 밟고 다니기가 미안하다. 민들레꽃 꿀에 빠진 벌은 거의 혼수상태라 사진을 찍는 소리도 못 듣는다.

산이 가까운 쪽으로 진초록잎 사이로 뱀딸기는 빨간 립스틱 뺨치는 고혹적인 빛깔이다. 주황색 나리꽃의 짙은 꽃술은 시골 다방 마담의 속눈썹같이 화려하다. 흑상추는 이름과는 달리 자주색이다. 잎 중앙은 푸르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자주색을 띠는데, 햇빛에 따라 잎마다 달라지는 자연의 색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상춧잎 한 장만 들여다봐도 심심치가 않다. 상추허리가 길어지면서 잎이 작아지는 걸 보니 꽃대가 올라오려나 보다. 배봉지를 싸던 남편이 사진을 전송해왔다. 우리집에 두꺼비가 있다고. 그것도 두 마리나 보았다고. 옛날의 것과는 달랐지만 반갑고 흥분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카톡으로 애들에게 사진을 전송하며 만세를 불렀다.

실전 노동은 만만치가 않다. 자세는 시간이 갈수록 겸손진다. 허리를 숙이다 쪼그려 앉다가 무릎을 세워보다가 해가 기울 때면 주저앉아 엉덩이로 밀고 다닌다. 종아리가 뭉치고 목과 등이 뻣뻣하고 굳으면 아예 풀밭에 드러누워 쉬다가 무거운 다리로 어둠을 털고 집으로 들어온다. 그래도 나는 내일 또 나갈 거다.

자연의 행간 속에서 생명들과 호흡하며 교감하는 일이 즐겁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아름다운 동화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자연의 사소한 것까지라도 깊이 관찰하는 것은 인생 연극무대 맨 앞자리에 앉자 보는 것과 같다’고. 어쨌든 나는 좋은 좌석을 차지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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