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국보훈의 달 특집 : 여성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황애덕 선열의 자부 남옥우씨에게 듣다)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서 달리지 못합니다.”

남성들이 주도적으로 3.1만세운동을 이끄려 할 때 황애덕 여성독립운동가가 외친 말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할 수 있도록 자리를 개척하며 애국심과 더불어 평등의식을 드높였다.

▲ 황애덕 여성독립운동가의 자부 남옥우씨(왼쪽)와 질부 주영숙씨가 정부로부터 추서 받은 애국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황애덕 선생은 농촌계몽운동 선구자"
남편 잃은 미망인들에 직업교육 전수

여성참여로 만세운동 이끌어
남옥우씨는 시어머니인 황애덕씨의 곁을 지키며 말년을 극진히 보필했다.

“장남인 박영진씨와 결혼하면서 어머님에 대한 전기 ‘새벽에 외치다’ 책을 읽었어요. 남편과 어머님에게 독립운동 하신 이야기도 직접 들었죠.”

황애덕 선생은 1913년 수미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애국심이 깊은 아이들을 모아 ‘송죽결사대’를 결성하고 독립투쟁단체에 군자금을 보내며 일제로부터 억압 받는 우리나라에 애국심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또, 아픈 사람들을 돕고자 교사를 그만두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본의 의과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그는 미국 윌슨대통령의 ‘모든 민족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론에 의해 만들어진 ‘동경여자유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때가 1919년 만세운동이 우리나라를 넘어 외국에서도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이어지던 시기였는데, 황애덕 선생은 동경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만세운동을 결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런데 만세운동을 하는 유학생들은 모두 남성으로 이뤄졌고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남자유학생들을 찾아가서 ‘국가의 존립이 걸린 만세운동을 남자들만 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박하면서 ‘수레바퀴는 두 바퀴로 가지 한 바퀴로는 절대 못간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이를 통해 2.8 만세운동에 여성유학생도 참여해 독립선언문을 읽고 만세운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황애덕 선생은 2.8 만세운동을 이끈 주모자로 체포되면서 6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가석방 됐다. 그는 곧바로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애국부인회는 여성독립운동가로 많이 알려진 김마리아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영향력 있는 여성단체였다. 황애덕 선생은 총무를 맡아 군자금을 모으고 관리하며 13개도 각 지부를 결성하는 데 일조했다.

애국부인회가 발각되면서 황애덕 선생은 다시 대구 감옥에서 4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는 43명의 절도범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옥중에도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히면서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 훗날 수감생들은 황애덕 선생을 진정한 스승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농촌계몽운동 선구자로 활약
“어머니는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세요. ‘우리나라는 농업인이 잘 살아야 우리 모두 잘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부지런하자, 게으르지 말자’를 강조하셨습니다.”

황애덕 선생은 출감한 뒤에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와 농학을 배우고 귀국해 감리교 신학교 농촌사업지도에 힘썼다. 그는 1929~1945년 간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성광학교 6개소와 교회 2개소를 세워 교육사업에 헌신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이뿐만 아니라 콜롬비아대학을 졸업하면서 외국에도 많이 나가 1947년 YWCA에 한국여성대표로 중국 항주에서 개최된 세계대회에도 참석해 강연을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 여성단체연합회 초청으로 11개주를 순회하면서 4년 동안 한국의 문제에 대해 강연하는 등 해방 후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 여성독립운동가 황애덕 선생의 활동상을 담은 ‘새벽에 외치다’ (저서 박화성)

교육으로 6‧25전쟁 미망인 돕다
황애덕 선생은 노년기에 접어들 때도 6.25전쟁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교육사업을 펼쳤다.

“어머님은 한미종합기술학원을 설립하고 이미용, TV, 양재, 시계 등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전문교육에 미망인들에게 보급하면서 광범위하게 활동하셨습니다.”

이어 재단법인 송죽학원을 등록하고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면서 미망인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의 문을 넓혔다고 한다.

“어머님이 밖에서는 무척 엄하셨는데, 저에게는 결코 무섭지 않고 편안하고 따뜻하셨어요. 가사일도 못하는 일 없이 뭐든지 척척 잘해내시고 빠르게 하셨죠. 며느리인 저를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죠.”

남옥우씨는 황애덕 선생의 교육정신을 받들어 1978년 인천 부평에 청원유치원을 설립하고 40년 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청원유치원은 일반적으로 유치원에 없는 재단법인 송죽학원이 설립돼있다.

“제가 40여 년 간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입학식과 졸업식 때마다 원장으로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황애덕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알려주면서 우리 유치원의 재단법인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황애덕 여성독립운동가의 뜻에 따라 어린이들도 항상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아이들과 학부모들께 말할 때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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