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93)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후시하라 겐시 감독)를 봤다. 국내에 처음 수입 개봉된 지난 해 연말부터 벼르고 벼르다 6개월 만이다. 그것도 전용극장이 아닌 집에서 컴퓨터로 내려받아 이틀간 연거푸 두번을 봤다. 뭐 이렇다 할 요란한 재미나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를 보는 90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물 흐르듯 잔잔하게 화면에 흐르는 노부부의 일상이 새삼 ‘나’를 돌이켜 보게 하는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 또 늙어서는 황혼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영화는 일본에서 2016년 TV(동해텔레비)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됐다가 시청자 반응이 뜨거워 지난 해 영화로 개봉해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30만 관객을 동원하며 1년 이상 장기 상영하고 있다.

2014년부터 2년간 당시 90세의 쓰바타 슈이치 할아버지와 87세의 쓰바타 히데코 할머니의 일상을 꾸밈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도쿄대 건축공학과 졸업 후 당시 일본에 와있던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안토닌 레이몬드(Antonin Raymond;1888~1976) 밑에서 건축을 배웠다. 그리고 1960년대 일본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 개발계획에 참여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쉬는 슬로라이프 실현을 꿈꾸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손을 떼게 된다. 대신 1975년, 뉴타운 밑에 350평의 빈 땅을 사들여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통나무집에 살며 50년간 꽃과 나무를 키우고 텃밭을 가꾼다.

노부부가 스스로 심고 가꾸어 온 텃밭과 집 주위의 울창한 나무숲에서는 50종의 과일과 70종의 채소가 철을 달리하며 자라나고 익는다. 텃밭 구석구석에는 슈이치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꽂아놓은 귀여운 노란 안내팻말이 정겹기만 하다.- ‘죽순아, 안녕’,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 밀감 -마멀레이드가 될거야’, ‘머위꽃대 -기다려지네요’, ‘숲은 자연의 에어컨… 시원해라~’, ‘능소화 -붉은꽃의 터널을 즐겨보세요’,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 ‘대문은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등이다.
65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온 이들 노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배려심도 영화가 흐르는 시간 내내 보는 이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준다. 할아버지가 좋아한다는 감자크로켓을 즐겨 만든다는 히데코 할머니는, ‘결혼하면 남편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고 배웠다며 “제대로 된 것을 챙겨 먹이고, 제대로 된 것을 입히고… 그래서 남편이 좋아지면, 돌아서 결국 나에게로 온다”며 해맑게 웃는다.

그런 늙은 아내에게 늘 ‘스스로 꾸준히~’를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해 온 슈이치 할아버지는 “그녀는 내게 최고의 여자친구”라고 말한다. 그는 다큐 촬영 중이던 2015년 6월2일, 아침나절 제초작업 후 낮잠에 든 채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혼자가 되면 몇 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하며 남편을 보고 웃던 히데코 할머니는, 그 4년 뒤인 지난 4월 초 꽃비가 내리던 날 남편 곁으로 갔다.

이들 노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이 그려진 영화가 끝나면서 떠오르는 자막들도 눈길을 잡아맨다.ㅡ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르 코르뷔지에), ‘모든 답은 위대한 자연 속에 있다’(안토니오 가우디), ‘오래 갈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 진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리고 이 다큐 촬영을 끝내고 작년 9월 죽은, 일본의 국민 엄마배우로 칭송받던 키키 키린의 나직한 내레이션(해설) 음성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 진다/땅이 비옥해 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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