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상 수상작 - 제주 김정배씨의‘충의에 불타는 오흥태’

▲ 아름다운 섬 제주의 사람들은 받은 은혜는 꼭 갚는다는 ‘의리’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제주 성산읍 한 들판 풍경)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지면을 통해 제3회 농촌 스토리 공모 수상작들을 게재한다. 이번 호에는 우수상을 수상한 제주 김정배씨의 글을 싣는다.

계사년(숙종 39년, 1713), 그해 가을은 처참했다. 파종 시기부터 이상기온으로 씨앗이 제때 나지 못했는데, 9월 들어서는 무서운 태풍이 섬을 휩쓸었다.
밤새 불어대는 바람 소리에 흥태는 한숨도 못 잤다.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나 등잔불을 켜고 책을 받아 앉았다. 바람은 그때까지도 불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살라고.”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는 듯했다. 나가보지 않아도 문밖 풍경이 눈에 선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책을 붙들고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흥태는 자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태풍 세력이 센 것 같지요.”
자는 줄 알았던 아내가 말했다.
“당신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구려.”
“네, 바람 소리가 어지간해야지요.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되어 있을 거 같아요.”
“이렇게 큰 태풍은 처음 봤어. 저기… 으음.”
흥태는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선뜻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꾹 눌렀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그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데 과거 시험 보는 거 그만두려고 해요. 찾아보면 다른 일로도 마을과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소. 어쩐지 허구한 날 책만 붙들고 있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지 뭐요.”
흥태가 얼마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주저하며 꺼냈다.
형 흥주는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아버지와 같은 유향 별감이 되었다. 하지만, 흥태는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해도 번번이 낙방했다.
“당신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아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남편의 생각을 존중해 주었다.

흥태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껴입었다가 벗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아니, 그보다 꼭 해야 할 일이 기다리는 것만 같아서 힘까지 났다.
흥태는 날이 밝아 바람이 잠잠해지자 친구인 관표네 집에 찾아갔다.
“관표 있는가?”
흥태 목소리에 한껏 힘이 들어있었다.
“어! 나, 여기 있어.”
태풍에 떨어져 나간 뒷문을 고쳐 달던 관표가 마당으로 나오며 말했다. 흥태는 아내에게 했던 말을 관표에게도 했다.

“자네 같은 인재가 우리 마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든든하지. 자네가 하는 일이라면 나도 힘껏 도울걸세.”
속 좋은 관표 역시 흥태가 하는 말에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흥태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이 마을 한 바퀴 돌며 급한 일을 찾아 도와주면 어떻겠나? 이리로 오다 보니까 지붕이 날아가 버린 집들도 있던데.”
흥태는 바로 마을 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함세. 언제나 자네는 나보다 한 수 위라니까. 나는 내 집 걱정만 하는데. 자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구먼.”
관표는 흥태를 한껏 추켜 주었다.

흥태와 관표는 마을 청년들을 더 불러내어 마을을 둘러보며 먼저 손 볼 곳을 찾았다.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누웠고, 지붕 한 귀퉁이가 날아가 버린 집들이 있는가 하면, 문짝들도 길에 나뒹굴었다. 밭은 밭대로 익어가기 시작한 곡식들이 큰 비바람에 드러눕거나, 물에 잠겨 있었다.
흥태와 관표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노인이 사는 집 지붕부터 수리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쓰러진 나무들도 치우고 뒹구는 문짝들도 제집을 찾아주었다.

태풍이 제주를 휩쓸고 간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자네도 들었지? 쓰러진 나무와 흙더미에 덮인 집들이 무려 2천여 호나 된다는 거.”
관표가 어디서 듣고 왔는지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옷소매로 쓰윽 닦으며 말했다.
“음,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사람들도 많이 깔려 죽고, 소와 말도 4백여 필이나 죽었다더군.”
흥태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풍 피해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흥태가 사는 시골 마을까지도 곧잘 들려왔다.

“부서진 것을 복구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굶어 죽는 것은 시간문제지.”
관표는 아침에 어린 자식이 배고파 칭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온 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게 말일세.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할 텐데.”
흥태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답답했다. 시기가 가을걷이를 기다리던 때라 너나없이 쌀독은 비어있었다. 흥태네 집도 식량이 달랑달랑 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린애가 있는 집은 사정이 더 심각했다.
“여보, 우리도 없겠지만 쌀 한 사발만이라도 관표네 줘야 할 것 같구려. 아기가 굶어 죽을 지경이라는데, 내 밥그릇에 밥을 줄이도록 해요.”

“세상에,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네요. 우리야 어른이니 풀뿌리로라도 버텨 보지만 그 집은 어린아이가 있으니 오죽 어렵겠어요. 몇 번 죽 끓여 먹일 거라도 갖다 줘야겠어요.”
관표 아내는 마치 자기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하며 말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갔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구호곡이 온대요.”
다른 마을에 일 보러 갔다 돌아온 젊은이가 듣고 와서 말했다. 제주 목사 변시태가 도민의 위급한 상황을 자세히 적어 조정에 구호곡을 청하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조정에서는 장계에 대해 의논을 하고, 숙종은 비변사 관리들에게도 의논한 후에 구호곡을 보내 주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흥태는 마을에 구호곡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집에 양식이 조금이라도 여유분이 있는 집은 굶고 있는 집에 나눠 주도록 하세요.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습니다.”
흥태는 양식이 있으면서도 한 톨도 나눠 먹으려고 하지 않는 몇몇 집을 설득해서 나눠 먹으며 버티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마을에 구호곡이 도착했다.

“와! 구호곡 왔다.”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줄을 서셔야 합니다. 이번은 우선 어린아이가 있거나 노인이 계신 집부터 먼저 받아 가도록 하세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새벽부터 나와서 기다렸는데. 먼저 온 사람부터 나눠 줘야지.”
마을 사람 모두가 흥태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니었다. 앞줄에 섰다가 뒤로 물러서게 된 사람은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관표네도 아쉬운 대로 얼마 동안 버틸만한 양곡을 받아 가게 되었다. 관표는 어린 자식이 배에 곡기가 들어가자 방싯거리는 것을 보고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실존인물인 의사 오흥태 비가 세워져 있는 난산마을.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목숨 걸고 동참할 생각이네. 배고파 죽어가는 애를 살려주셨으니 응당 보답을 해야지.”
흥태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흉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해인 갑오년(숙종 40년, 1714)까지 이어졌다.
“하늘도 너무 하시지.”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했다. 부녀자들은 바다에 가서 미역이나 톳을 캐다 쌀을 한 줌 넣어 죽을 끓여 끼니를 때웠다. 곡식이 바닥이 나 구호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라에서는 호남 비축곡과 영남미와 전주미 등을 제주로 들여보내 주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자, 나라에서 저축하여 두었다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데 쓰던 진곡도 보내 주었다.

“여러분, 제주는 바다 건너에 있어서 임금의 덕행이 미치지 못하는데 올해(숙종 40년, 1714)는 임금이 특별히 걱정하여 구휼미를 보내 주셨습니다.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음,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흥태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임금님을 칭송했다. 흥태는 언젠가는 이 은혜를 꼭 갚으리라고 다짐했다. 비단 흥태나 관표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받은 것은 반드시 갚는 것이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1728년(영조 4년) 흥태 나이 46세 때였다. 흥태는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신이 번쩍 드는 소문이 들려왔다. 소인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고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구나.’
흥태는 이른 저녁을 먹고 관표네 집에 찾아갔다.
“자네 있는가? 날세.”
흥태가 신발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관표를 부르자, 나무문을 열고 관표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게. 이렇게 추운데 어쩐 일인가?”
관표는 마루 한가운데 놓인 화로에 참나무 숯을 더 넣어 따듯하게 불을 피우고 마주 앉았다.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요즘 나라가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거 말일세.”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면서?”
“음, 그렇다는군.”
흥태는 이미 무슨 결심을 한 듯했다.

“자네도 계사년의 흉년을 잊지 않았겠지?”
“물론이지, 어찌 그 끔찍했던 흉년을 잊을 수 있겠어?”
“그럼, 그때 나라에서 구호곡을 보내 주어서 허기를 면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도 기억하지?”
“아무렴, 우리 막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다 나라 덕이었는데.”
관표는 그때 아이들이 배고파 누렇게 뜬 얼굴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흥태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시작했다.

“나, 나 말이야. 근왕병을 모집하려고 해.”
“뭐! 근왕병?”
무슨 일이든 돕겠다던 관표도 여기까지는 생각 못했던 것이라 적잖이 놀랐다. 근왕병이란 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군인을 말하는 것이다.
“음, 영조 임금이 누구냐? 바로 우리를 구해준 숙종 임금의 아들 아니더냐? 우리가 은혜를 입었으니 우리도 나라가 어려울 때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 백성으로서 도리가 아니겠니?”
“그야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언제나 흥태 말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따르던 관표도 이번만큼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네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거야.”
흥태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거역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네 결심이 정 그렇다면 도와주겠네.”
관표 역시 단호했다.
“고맙네, 친구.”
흥태는 관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우선 격문부터 써서 각 마을에 돌릴 생각이네. 내가 격문을 쓰면 자네가 삼 읍을 돌며 돌려주게나.”
삼읍은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을 말한다.
“알겠네, 염려 말게.”
흥태는 관표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바로 격문을 쓰기 시작했다.

가슴과 머리에 차 있던 생각들이 붓을 통해 종이 위로 쏟아졌다.
‘다음과 같이 격문을 띄우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과 어버이요. 귀한 것은 충성과 효도는 둘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하고 나자,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배울 때 오륜에 대해서 배운 것이 생각났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붓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아들 된 자는 임금과 어버이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구차하게 살려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위급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신하가 임금의 어려움을 풀려고 먼저 서둘지 아니한다면 충효의 마음에 죄가 될 뿐만 아니라 소나 말 같은 무리가 될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여기까지 쓰고나서 한숨 돌리고 나서 붓에 먹물을 찍었다.
‘우리 제주도는 지난 계사년(숙종 39년, 1713)과 갑오년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 잊지 못할 국가의 은덕을 입었습니다. 우리 섬의 백성들이 굶주릴 때 숙종 대왕께서 특별히 곡식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초목 금수도 하늘에서 비와 이슬을 내려주는 은혜를 알거늘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야 하겠습니까? 지금 임금님이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라 신하가 목숨을 바치기에 알맞을 때입니다. 선대의 임금님을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전날 구원하여 준 은혜를 생각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적진과 맞부딪혀 우리의 임금님께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흥태는 여기까지 단숨에 썼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붓을 놀렸다.

‘옛사람은 성공과 실패, 무기의 날카롭고 둔함은 의논할 것이 못 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싸움에 이기고 질 것과 한 몸이 죽고 살 것을 헤아려 그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다면 어찌 충신 의사의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흥태는 격문을 다 쓰고는 충성을 맹세하듯이 임금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며 큰절을 했다. 이때 새벽을 알리는 닭이 ‘꼬끼오’ 울었다. 그제야 한숨 눈을 붙이고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관표를 찾아갔다. 관표 역시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터였다.
“자네도 잠을 못 잤구먼.”
흥태가 관표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영 잠이 오지 않더라고.”
관표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히 자네까지 걱정을 끼쳤나 보네. 밤새 쓴 격문인데 잘 되었는지 한번 읽어봐 주게.”
“어련히 잘 썼겠지. 내가 본들 뭘 알겠나.”
관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흥태한테서 격문을 받아 읽어 내려갔다.
“함! 구구절절 옳은 말일세.”
“그럼 격문은 되었으니 여러 장에 옮겨 적어서 빨리 삼 읍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해야겠네.”
격문 돌리는 것은 관표가 책임져서 발 빠른 청년을 뽑아 삼 읍으로 보내고 관표도 직접 격문을 갖고 제주목으로 갔다. 삽시간에 격문은 제주도 전체에 뿌려졌다. 흥태가 쓴 격문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격문의 효력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우리도 근왕병 모집한다는데 나갑시다. 이참에 나라에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지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가 흉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격문을 본 장정들이 흥태가 사는 난산리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근왕병은 모여들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뱃길이 막힌 것이다. 제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뱃길을 통해서만 육지로 나갈 수 있어서 날씨가 좋지 않으면 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서 날씨가 풀려야 출발할텐데.’
흥태는 속이 바삭바삭 타들어 갔다. 어쩔 수 없이 날씨가 좋지 않아서 출발을 못하고 마을에 한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흥태는 육지로 나가려고 기다리는 동안도 무예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뽑아 훈련을 시키도록 하며 출전할 날을 기다렸다.

마을에서는 모여든 장정 수백 명을 먹이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 모두가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남자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부녀자들은 음식을 해 먹였다. 그러기를 얼마가 지났을 때였다.
“난이 진정 되었대.”
흥태가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이 하루빨리 멈춰주기를 바라며 훈련을 시키고 있을 때 난이 진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난이 진정되어 버렸다고? 이참에 나라의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모여든 장정들은 출진도 해보지 못하고 난이 진정 되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흥태 역시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라의 난이 끝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우리가 뱃길이 막혀 출진을 못하는 사이 나라에 난이 평정되었다고 합니다. 난이 평정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전선에 출전하여 나라에서 입은 은혜를 갚으려고 했지만, 이제 출진을 중지하고 오늘로 의병을 해산해야겠습니다. 격문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여러분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흥태는 비록 출전은 못 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의병들을 돌려보냈다.
훗날 정조 임금은 어사 심락수를 제주에 보내어 섬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주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심락수는 바다를 건너와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오늘 어사께서 우리 마을을 지나가신다는구먼.”
미리 어사의 일정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조카인 경관도 듣게 되었다. 흥태는 아들이 없이 돌아가서 형님 아들인 경관을 양아들로 삼고 있었다.
경관은 양아버지의 업적이 잊혀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때다 싶어 잘 간직하여 두었던 격문을 어사께 갖고 가서 바쳤다. 어사는 단숨에 격문을 읽어내려갔다.
“허,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묻혀 두었다니!”
격문을 다 읽은 어사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격문은 비록 빛이 바래었지만, 어사가 읽어보니 의로운 기상이 엄숙하여 햇살이 빛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곧 임금님께 장계를 올리리다.”
어사 심락수는 곧바로 임금님께 글의 내용을 쓴 장계를 올렸다. 심락수가 올린 장계를 받아본 정조 임금은, “정의현 오흥태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의로운 기상을 표창하지 아니한 것은 실로 흠 되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특별히 어사에게 명하여 오흥태의 정려를 세우도록 했다. 또 의사로 정하고 어사가 직접 그의 사적을 기록하도록 했다. 정려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이다.

당시 나랏법에는 실적이 없으면 정려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순국한 충신에게만 정려를 세워주던 때였다. 그런데 임금께서 특별히 전례를 깨고 정려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정려 앞을 지날 때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말고 멈추어 서서 좋은 풍속을 본받게 하라.’고 했다.
오흥태 의사는 비록 출전은 못 했지만, 제주 의병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비문을 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곤 한다. 

 

■  현장인터뷰

▲ 김정배씨의 방 한쪽 장식장에는 각종 글쓰기 대회에 참여해 수상한 상패들이 가득하다.

돋보기 쓰고 책 읽는 할머니 모습 닮고 싶어~

생활개선회 문학동아리 계기로 작품활동 시작
각종 글쓰기대회서 수상…동화작가로 활동 중

>>제주의 충효사상 동화로 널리 알리고파

5월 중순의 제주는 마치 향수를 뿌려놓은 것처럼 달콤한 귤꽃 향기로 가득했다. 특히 서귀포 지역은 감귤밭이 많아 향이 유난히 짙다.
2018년 농촌여성신문이 주최한 제3회 스토리공모에서 ‘충의에 불타는 오흥태’란 작품으로 우수상을 탄 김정배씨는 제주 서귀포 신산포구에서 북쪽 방향인 난산리에서 감귤 농사를 하고 있는 여성농업인이다. 생활개선회 성산읍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쓴 작품의 주인공인 오흥태는 실존인물로 1728년 영조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왕을 돕기 위해 제주에서 근왕병을 모집했던 난산마을의 선비다. 비록 오흥태가 의병을 모아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기 전에 난이 진압됐지만, 당시 오흥태가 의병을 모으기 위해 쓴 격문의 내용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 후에 의사 칭호를 받게 됐다.

정조 17년인 1763년에 이 마을에 왔던 어사 삼락수가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새긴 비석이 난산 마을에 보존돼 있어, 18세기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상을 알 수 있는 향토사적 가치가 있다.
김정배씨는 고향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남편인 오명율씨 집안의 선조인 오흥태 의사의 얘기를 동화로 각색해 널리 전하고 싶어 글을 응모했다고 한다. 김정배씨는 현재 여러 권의 동화책을 낸 동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김정배씨의 작품집

제주 토박이인 김정배씨가 남편과 감귤·무·유채 농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글을  쓰게 된 것은 생활개선회 활동이 계기가 됐다. 2002년 남제주농업기술센터(현 서귀포농업기술센터)에 생활개선회 문학동아리가 처음 생기면서 이곳에서 글쓰기를 배웠다. 같은 해 우연히 우정사업진흥회에서 공모한  전국주부편지쓰기 대회에서 루사태풍을 소재로 한 그의 글이 당선되면서 글쓰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글쓰기 공부는 책 읽는 것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는 동화책을 함께 읽었고,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는 선생님들로부터 소설과 수필집 등을 빌려서 읽는 등 닥치는 대로 독서하기를 좋아했어요.”
그 후로 김정배씨는 각종 공모전에 참여해 당선됐고, 거기서 받은 상품과 상금들은 알뜰한 살림살이에 소소한 보탬이 되기도 했다.
김 씨의 남편 오명율씨도 살림하며, 농사짓고 시부모님 모시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만 잠을 덜어가며 글을 쓰는 아내를 은근히 응원해줬다. 

“연탄보일러를 방 한 칸만 때던 시절이었어요, 남편 숙면에 방해될까 두터운 옷을 걸치고 부엌에서 책을 보는 저에게 남편이 노란 스탠드 하나를 사다줬어요. 당시의 고마움을 간직하듯 그 낡은 스탠드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후에 김 씨가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도움이 컸다. 김정배씨는 MBC 여성백일장 대상, 농협문화복지재단에서 최우수상 등에 당선되며 농사일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사문단에 동화 3편이 당선되며 등단해 작가가 됐고, 서귀포신인문학상과 아동문학평론 동화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농촌여성신문 농촌스토리 공모에 제주의 충효사상을 널리 알리고 싶어 오흥태 의사 이야기를 소재로 작품을 구상했지만 어려움이 있었다.
고문서에 나와있는 오흥태 의사에 대한 자료는 해석이 쉽지 않았다. 잠시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한학을 하는 은사님의 지도로 다시 용기를 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읽다보니 동화책이 가장 쉽게 읽히고 이해도 잘돼 동화 형식으로 정했죠.”
오씨 집성촌이기도 한 서귀포 난산마을에 역사 속 인물인 오흥태 거리가 조성되고 아이들의 마음에 충효사상을 심어주는 곳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마을에 난산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상태라 학교를 오흥태 의사의 사상을 알리는 장소로 사용해도 좋을 듯하단 큰 그림까지도 미리 그려본다.

“자그만 책상 앞에서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 할머니의 모습을 훗날의 아름다운 제 모습으로 그려 본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그리고 닮아가려 하다보니 자연스레 글이 됐네요.”
김정배씨는 2017년 제주 해녀이야기를 담은 단행본 동화책 ‘할머니의 테왁’을 발간했으며 오는 7월말 경 ‘반짝반짝 작은등대 도대불’이란 동화책도 곧 낼 예정으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전 정말 끊임없이 노력해서 작가가 된 경우죠. 지금도 새벽 4시에 알람을 켜놓고 일어나 글을 씁니다.”

6시 밭일 하러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의 시간이 김정배씨가 오롯이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고, 나머지는 농사일을 주로 한다. 6만6000㎡(약 2만평)농사를 부부의 힘만으로 해내는 전업농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살아온 삶이 대단한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살아서인지 후회가 없어요. 인생의 갈림길에서 항상 배움의 길로 간 것이 지금의 삶을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김정배씨는 제주 여성의 강인함과 성실함으로 농사지으며 글을 쓰는 아름다운 삶을 가꿔오고 있다는 마음 속의 자긍심을 슬쩍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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