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으로 -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정읍을 찾아서…

▲ 동학농민들이 봉기했던 고부의 요즘 모습.

5월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올해부터 법정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돼 농민과 함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외세에 맞섰던 운동이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4년 5월11일. 그날은 정읍 황토현에서 농민들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전승일이다. 민중운동으로 재조명 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를 찾았다.

>>동학농민들은 평등한 삶과
    외세 배척을 위해 뭉쳤다

2019년의 봄날의 정읍, 그곳은 1894년 갑오년에 농민들의 울분이 분출했던 곳이라곤 상상도 못할 정도의 평온함만이 가득했다. 양반 세력의 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조선시대 고부지역의 현재 모습은 동네 길목마다 노란 유채꽃이 가득하고 진하고 연한 분홍색이 어우러진 영산홍꽃이 집집 울타리에 활짝 꽃피워져 아름다운 봄 동네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머리맡에 찬물 한 사발, 긴 밤을 깁는, 고얀놈 고얀놈, 할아버지 마른기침 소리 들린다. 갑오년이던가 쇠스랑 메고 조선낫 들고 황토 벼랑 기어오르던 남정네 괄괄 솟던 피, 지금도 우렁우렁 살아우는 피, 삼천리 산하에 피었다.
-진달래 (조재훈 시)

역사 속에서의 명칭이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농민운동으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으로 점차 가치를 인정받게 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의 출발점은 “도저히 배고프고 힘들어서 못참겠다”는 백성들 가슴 깊은 곳 응어리의 분출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갑오년에 발생한 농민이 일으킨 전쟁이란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정신이 역사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과 유물과 유품들을 모아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진은 고부관아 습격 장면(사진 왼쪽)과 황토현 전투 장면.

동학, 농민들 마음을 사로잡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 조선말의 나라 사정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라 밖에선 서양 열강과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에서는 조선 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되며 지방 수령과 양반들의 횡포와 수탈이 극에 달해 백성들은 불안하고 궁핍한 삶에 지쳐있었다.
동학은 이런 백성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전하는 빛줄기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란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백성들 마음에 파고들었다.

원래 동학은 1860년에 경북 경주 지역의 최제우가 기존의 낡은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구 열강의 위세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불교·도교의 장점을 살려 동학을 창도해 포교를 시작했다. 당시에 핍박 받던 농민의 염원을 수용해 체계화 했기에 순식간에 전파돼 유행했다. 조선왕조는 동학을 불온한 사상으로 지목해 1863년에 최제우를 처형했으나 그후 2대 교주 최시형이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동학교단의 기틀을 다지고, 충청·전라·경상도 등에서 조직망을 갖췄다.

도화선이 된 고부 군수 조병갑의 만행
1894년 1월 추운 겨울, 전북에서 농민봉기가 처음 일어났다. 이곳은 예로부터 기름진 곡창지대였기에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심했다. 특히 전봉준이 살았던 고부군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횡포가 심했다.
직접적 원인은 농사에 물을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은 만석보로 인한 갈등이었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는 예동보가 있어 농민들은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고부군수 조병갑은 강제로 백성들을 동원해 만석보를 축조하고 세금을 걷어 들이며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

▲ 요구 내용을 적고 주모자를 드러내지 않고 빙 둘러서 서명한 사발통문

‘이제는 더 이상 못참겠다. 우리도 이 나라의 백성’이라며 농민들이 일어나 만석보를 부수고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봉기 이전에 준비가 있었다. 1893년 11월에 전봉준 등 농민들은 고부 죽산마을 송두호 집에 모여 봉기를 모의했다. 봉기의 당위성을 적은 격문에 사발통문을 작성해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둥그렇게 서명해 모두가 책임지자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그 집엔 아직 송두호의 후손들이 살며 당시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동학 조직의 힘이 발휘됐다
어떤 힘이 동학농민의 세력을 모았을까?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의 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학의 조직은 포접제로 구성돼 있다. 접은 가장 기본적인 조직으로 35~75가구로 조직됐고, 당시 6인가구라 치면 210명에서 450명 정도에 이른다. 포는 수십개의 접이 모여 이뤄진 조직으로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라고 한다. 동학의 최고 지도자였던 손화중과 김개남은 대접주였다.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였다.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을 모으고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조병갑을 쫓아내고 관아 창고의 식량들을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줬다.

관군에 대승 거둔 황토현 전적지
이렇게 고부에서 조병갑을 쫓아내고 조정에서도 새 군수를 보냈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동학농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다시 뭉쳤다. 무기라곤 고작 죽창뿐이라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백산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시작은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였으나 낡은 세력을 몰아내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절실함으로 뭉쳤다. 고부에서 황토현까지 가려면 해발 35m의 구릉지인 황토재를 넘어야 한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3~4월에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한 농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집결했을까?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외세 침입의 빌미를 막기 위해 조정과 협상한다.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전봉준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민족주의 입장에서 동학농민들은 2차봉기를 감행하지만 결국 무기의 열세로 패하고 만다. 공주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지도자들이 죽거나 잡혀가고 뿔뿔이 흩어졌다.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슬픈 노랫말처럼 전봉준도 관군에 잡혀서 압송돼 사형을 당한다.

▲ ‘사람답게 살겠노라’고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봉기한 이름없는 동학농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무명동학농민 위령탑이 고부면 신중리에 있다.

무명의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심정을 기억하자

동학농민의 봉기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시 혁명에 참가한 농민군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20만 명에서 30만 명까지로 어림잡고 있다.
미완의 혁명으로 막을 내린 동학농민혁명이기에 많은 서글픈 목숨을 앗아갔다. 이들을 위한 무명동학농민 위령탑이 1994년에야 동학농민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정읍 고부면 신중리에 세워졌다.

목숨을 잃은 동료를 안고 절규하는 죽창을 든 농민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주탑과 비탄에 잠긴 농민군의 얼굴과 무기로 사용했던 죽창 호미, 또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같은 밥그릇이 새겨진 보조탑이 있다. 당시 처절했던 농민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져 보는 이도 숙연해져 자연스레 묵념을 하게 된다.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고생하지 않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마음 속으로 빌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은 이후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며 계승돼 발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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