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90)

불과 반세기-50년 전만 하더라도 부엌은 여성의 가사노동이 응결된 대표적인 폐쇄공간 이었다. 음식그릇을 쟁여놓은 살강, 무쇠가마솥과 아궁이, 부지깽이, 바가지, 아궁이 불씨를 지피던 풍구… 전통사회에서는 ‘남성 절대 출입금지’의 여성 전용공간이자 온종일 손에 물기 마를 날 없는 고된 일상을 삭여가며 된 시집살이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던 며느리이자 아내, 엄마들의 사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70년대에 들어서는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면서 생활개선사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부엌개량 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무쇠솥을 걸던 낮은 흙부뚜막들이 입식 시멘트 부뚜막으로 탈바꿈 하면서 무쇠솥은 얇고 가벼운 양은 솥으로 대체됐다. 손이 트도록 기왓가루 수세미질 하며 광 내던 놋주발, 사기·사발그릇들은 던져도 깨지지 않는 양은·스테인리스·플라스틱그릇으로 바뀌었다. 주택개량·새마을 연립주택·아파트 보급으로 부엌은 ‘주방’이라는 실내공간으로 바뀌면서 내실공간으로 들어갔다. LPG가스, 석유곤로, ‘코끼리 밥통’이 보급되면서부터는 이젠 더이상 눈물 찔끔거려가며 무쇠솥 아궁이에 불 지펴 밥을 짓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이제는 주부들이 주방에서 불 피우고 칼질 하는 시대가 가고 있다. 오랜 가사노동에 시달리던 주부들이 주방에서의 ‘해방선언’을 하고 나섰다. 주방규모를 최소화 하거나, 아예 주방을 폐쇄하고 주방 문을 닫는 ‘키친 클로징(Kitchen Closing)’ 가정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부분이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대신 집 근처 맛집의 배달 음식과, 손질된 식재료가 들어 있는 반조리 음식세트인 ‘쿠킹 박스’, 이미 조리돼 있어 데우거나 끓이기만 하면 되는 가공식품업체들의 가정 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들을 이용해 모든 끼니를 해결한다. 냉장고를 아예 없애고 하루 한끼 분량의 밑반찬과 채소를 사 먹으며 ‘미니멀 라이프(간소한 삶)’를 실천하는 젊은 부부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19 식품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가공식품업계의 가정 간편식(HMR) 시장 판매액은 2조6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2017년 8년간 가정 간편식 시장이 연평균 17.3% 고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연구원은 분석했다. 특히 업계에서는 가정 간편식 시장 소비자가 1인 가구에서 중·장년층으로 점차 확산돼 가고 있다고 전망해 주목된다.

이처럼 주방이 작아지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 약 350억 달러(약 39조2000억 원)인 세계 음식 배달시장 규모가 해마다 20%씩 성장해 2030년에는 지금의 10배가 넘는 3650억 달러 규모가 될 것이라고 스위스 금융기업 유 에스 비(USB)는 전망하고 있다. 학자들은 “여성의 가사노동이 사회화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젠 ‘집밥’도 돈 주고 사먹는 시대가 됐다. 이래저래 아내의 ‘손맛’에 길들여진 ‘삼식 씨’의 수난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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