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농촌 스토리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 전북 장수 안다섬씨의‘땀방울, 내일을 만들다’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전북 장수군 안다섬씨의 글을 싣는다.

 5000만 원 빚으로 시작한 농사, 잇딴 실패
 실패는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었던 귀한 경험
 주변 농가와 법인 설립해 초보 농사꾼 딱지 떼

풋내기 농사꾼의 땀
꿈을 맺어

농업을 공부하고 농사일을 하게 된 것까지 벌써 강산도 변하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초보티를 벗지 못한 나는 여전히 풋내기 농사꾼이다.
풋내가 나는 이 어린 농부의 얘기를 해보려 한다.
농대를 졸업하고 나는 부모님 것이 아닌 나만의 것, 내 땅, 내 농장을 갖고 싶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종종 집에 내려와 부모님 농장 일을 도와드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블루베리 밭에 새가 블루베리를 먹지 못하게 막아줄 새망을 설치하고 있었다.

“아~ 거~ 대충 치고 가게” 아빠가 말했다.
“아니 어차피 칠 건데 좀 쫙쫙 땡겨가꼬 잘 좀 하자”라며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술렁술렁 망을 치더니 일을 마치려 했고, 나는 망을 당겨서 깔끔하게 일을 끝내고자 했다.
이런 사소한 작업 방식들이 맞지 않는 날들이 계속 생겼고, 주먹구구식 농업이 아닌 내가 배운 것들을 적용해보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해보고 싶었다.
이때 난 부모님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서 농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5년 개나리가 만개한 봄날, 개나리 꽃말인 희망처럼 나의 농사 이야기는 시작됐다.
주변엔 화사한 꽃들이 만발했고 거기서 피어오른 꽃내음은 세상에는 실패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이 아름답고 향기롭기만 했다.
젊음과 열정만 있다면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이뤄낼 것만 같은 희망을 안고 땡전 한 푼은커녕 5000만 원의 빚으로 오미자 농사를 시작했다.
겨울 동안 방치된 오미자를 전지하고, 20kg가 되는 퇴비를 절구통마냥 안고 끙끙거리며 옮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빠져 퇴비를 질질 끌고 기어 다녔다.

그렇게 땀에 절어 퇴비를 옮기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땅에 퇴비를 준건지 나한테 퇴비를 준건지 온몸에서 닭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
뽑아도 또 뽑아도 뒤돌아서면 자라나는 잡초를 보고 있다 보면 온 밭에 제초제를 뿌려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도 꽤나 있었다.
그래도 내 밭, 내 오미자라는 생각에 처음은 참 열심히도 밭에 다녔다.
그렇게 봄나들이를 갈 새도 없이 어느덧 동네 입구에는 무궁화가 피어났고 무더운 여름날이 시작됐다.

집 앞에 한 발짝만 나가도 뜨겁다 못해 따갑던 햇볕과 후덥지근한 습기에 봇물 터지듯 흐르는 땀까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한증막을 떠올리게 되던 그 해 여름은 끝날 기미도 없이 계속됐다.
그렇게 이어진 더운 날들에 에어컨도 없던 집에서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며 벌러덩 드러누워 더운 숨을 몰아쉬는 날들을 반복했다.
무더위를 이겨보려 집 앞 계곡에 가서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발을 담그고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먹던 그때의 난 그 지상낙원 같았던 날들이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중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렇게 여유로웠던 한여름의 일상은 결국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높은 온도와 습도까지 그 녀석들은 나만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가느다란 줄 하나에 배배 꼬며 겨우 제 한 몸 건사하던 오미자들은 주렁주렁 열매를 맺기도 전에 흰가루가 온몸에 생기는 병을 얻었다.
결국 여름내 놀면서 나를 조이던 불안감은 온몸으로 퍼졌고 흰가루병 또한 차마 손써볼 새도 없이 밭 전체로 번져나갔다.
생각해보면 전혀 예상치 못할 것도 아니고 당연한 결과였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약도 쳐보고 잘라도 보며 온갖 시도를 해봤지만 이미 밭을 덮어버린 무서운 병환은 치료할 시기도 놓쳐 처치할 아무런 대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을 키운다는 농부란 직업에 있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나는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안일하고 게을렀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까맣게 타고 있는 내 속도 모르는지 얄밉게도 밭으로 가는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곱디고운 자태를 뽐내며 가을이 왔음을 알려왔다.
결국 상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겨우 살려낸 하품들로만 300kg를 수확하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올 한 해 농사는 잘됐어?”라고 물어오는 관심어린 주변의 질문이 불편했고 뭐라 답할 수도 없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당장 농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고 당시 그 밭은 내 모든 청춘과 돈을 투자한 생업의 현장으로 계속 낙담한 채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좌절하지 않고 문제점을 찾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혼을 쏟아 붓는 작업을 했다.
봄, 여름, 가을까지 곱던 꽃들도 모두 사라지고 밭에는 줄기만 남은 오미자와 나뿐이 남아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오미자 밭의 70%를 잘라 병반을 모두 제거하고 통풍을 개선했다.
그렇게 오미자를 다 쳐낼 때 즈음 작년보다 더 노랗게 개나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점적호스를 깔고 유황합제와 석회보르도액 등 친환경 약재를 만들어 살포하며 매일 밭을 관리했다.
교육이나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가더라도 5분이나마 밭에 들르고, 34도가 넘는 더위에도 일을 거르는 날은 없었다.

매일같이 흘려 온 땀방울들이 모여 내게 보답이라도 하듯 2016년에는 2050kg의 최상품 오미자를 수확할 수 있었다.
사실 주먹보다 작은 오미자지만 내 눈엔 포도처럼 커다랗게만 보였고, 새빨갛고 영롱하게 빛나던 열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환희와 기쁨을 내게 안겨주었다.
다 죽어가던 밭에서 마침내 그 탱탱한 오미자를 딸 때 느끼는 벅차오름은 아마 직접 키워서 따보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당당한 오미자 농부가 되었고 판로로 고민하는 주변 농가를 모아 첫 번째 법인을 설립했다.

실수는 있었지만 실패로 매듭짓지 않고 꾸준한 노력으로 성과를 이뤄냈다.
그때 그 시절 내가 했던 실수는 게으름이었고, 자만이었고, 어리석음이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던 꼭 필요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어느덧 빚도 다 갚고 가공공장도 지었으며, 주변 농가와 함께 농업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농부다.
여전히 현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끝없이 생겨나지만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처음의 마음을 되뇌며 노력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며 땀 흘릴 것이다.
땀방울은 내가 꿈꾸는 내일을 오늘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나는 봄이 오면 또 땀을 뿌리고 꿈을 맺어서 신뢰를 수확하는 초심을 지키는 농부가 될 것이다.

■  현장인터뷰

▲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농사꾼이 되고 싶다는 안다섬씨.

“제 길은 스스로 만들겁니다”

부모님 도움 받지 않는다는 초심 아직도 지켜
가공법인 설립 꿈 이뤄… 관광농원도 도전할 것

농업은 내 운명
학생 시절 4-H 활동을 하며 농업이 천직임을 일찍이 느꼈다는 안다섬씨. 그래서 부모님들의 걱정도 뒤로 하고 전라도에서 안동농업고등학교로 유학을 결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졸업 후 한국농수산대학교에서는 화훼학과로 학업을 이어나가며 처음에는 연꽃을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후가 맞지도 않았고, 누구의 도움 없이 시작하려던 차에 난방비 부담도 걱정됐다.

그래서 전북 장수에서 많이 키우는 사과와 오미자 중 고민을 거듭하다 가공에 용이한 오미자로 결정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초보농사꾼의 실패는 필연이었다. 묘목을 심고, 농약 없이 수확해보려는 욕심이 앞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2보 나아가기 위한 1보 후퇴쯤으로 여기고 더 많은 땀을 흘리기로 한 안다섬씨. 생과는 보관이 어렵고 먹기도 어려운 것 같아 오미자청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미자 빛깔이 너무 예뻐 막거리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발효지도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장수에서 발효식초를 만드는 곳이 거의 없어 어려움도 있었지만 직접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정성을 쏟았더니 정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자격증이 시작이 돼 오미자, 사과, 블루베리를 키우는 주변 농가와 식초를 만드는 가공공장 법인 설립의 계기가 됐어요. 거기다 어린 저를 믿고 법인의 대표로 밀어주셔서 어깨가 무거워요. 아직 기계 없이 공장만 덩그러니 있지만, 여기서 함께 영글어갈 우리의 미래가 벌써부터 기대돼요.”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아
법인의 대표를 맡을 정도로 걸출한 리더십은 처음부터 부모님과 농사를 아예 분리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는 그의 면모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밭에 예초기로 풀을 베어내면 그만큼의 일당을 드리는 건 물론이고, 어머니도 본인 일을 도와주는 만큼 정확한 대가를 주고 있다고.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는 게 저의 초심이었어요. 그래서 처음 5000만 원의 빚을 내며 시작해 이런저런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 그렇게 마음먹은 건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내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오히려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니까요.”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의 청년창업농 정착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한 안씨는 이제 가공공장에서 만들 제품을 전국에서 알아주는 어엿한 브랜드로 키우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부족한 게 많은 걸 알기에 잠을 줄여서라도 노력하고 있다는 그.
그리고 오미자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6차산업체를 꾸려 교육농장과 전시장을 갖춘 관광농원을 만드는 게 진정한 꿈이라고 덧붙였다.
“남동생도 저처럼 농수산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이곳에서 제 또래, 그것도 농사짓는 사람을 찾아보긴 아직도 어려워요. 하지만 농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우리 남매가 장수를 넘어 전국에서 알아주는 농사꾼이 되는 미래도 그려봐요.”       
이제 27살의 꽃처녀 안다섬씨의 꿈이 아닌 곧 이뤄질 그의 다부진 포부를 멀리서나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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