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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꽃 피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숭고한 사랑■ 특집 - 3·1운동 100주년 기념 :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찾아가다
이명애 기자  |  love8798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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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5  1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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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열사의 염원이 어린 곳, 천안 유관순 기념관과 그 일대에서는 애국심에 대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유관순 열사, 우리민족 독립을 향한 함성의 중심에 서다

“대한독립만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절하고 또 간절히 외쳤던 함성이 가까이서 들리는 듯,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이 남아 떠도는 곳에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보기만 해도 뭉클하고 가슴이 먹먹한 유관순 열사의 영정사진과 동상은 기념관 제일 높은 곳에 우뚝 서서 그날의 강철같이 강하고 굳건했던 의지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 모든 기억들을 모은 유관순 열사 기념관과 생가터, 초혼묘를 조성해 놓은 천안 병천 일원을 둘러봤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민족 독립운동의 대명사인 유관순 열사는 한때는 유관순 누나로도 불리던 때가 있었다.
대한독립을 목 놓아 외치던 때의 그의 나이 고작 16세, 그리고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하던 때가 불과 18세인 어린 소녀로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나에서 열사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그의 강건했던 독립의 의지와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져 기억되고 있다. 3·1운동의 상징이 된 유관순 열사. 이제 1919년 3·1만세를 외치던 그날에서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생가터에 남은
유관순 열사의 어린시절

천안 병천의 아우내 장터 인근인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그의 생가터가 보존돼 그를 기억나게 하고 있다. 생가터와 담이 붙어 있는 곳이 바로 매봉교회로 지금도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유관순 열사는 어린시절부터 교회를 다녔고,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 따라 둘째 딸인 그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교비 유학생으로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외부 인사를 초청한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관순 열사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19년 1월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도 기숙사를 빠져나와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해 3·1운동의 중심에서 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며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후 3월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고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됐고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서 기차를 통해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왔다.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의 생가. 예전 교통의 요지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였다. 생가 바로 옆에 교회가 이웃해 있다. 유관순 열사는 어린시절부터 교회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익혔다.
   
▲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 사망 후 시신을 수습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묘가 분실됐다. 생가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를 마련해 기리고 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부모를 모두 잃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아우내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며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했다. 
16세 어린 소녀 유관순이 그토록 원했던 민족의 독립을 향한 외침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3천 여 명이 모이는 더 큰 외침으로 울렸다. 비폭력의 하얀 외침이었건만 유관순 열사는 부모를 모두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때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칼에 잃는 애절한 아픔을 겪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됐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 열사는 상고하지 않았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지닌 열사의 모습이 유관순 열사 기념관 디오라마에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1920년 3월1일에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해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으며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들이 지하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됐고, 유관순 열사는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1920년 9월28일 순국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으로 알려진 말이다.

2013년 11월19일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기록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됨’이라 적혀있다.
이화학당 측이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으나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 열사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됐고, 이후 일제가 군용지 사용이란 미명아래 파헤쳐 흔적조차 알 수 없게 됐다.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는 열사의 초혼묘(招魂墓)가 모셔져 혼을 위로 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의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민족정신을 기리고 있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현재 정부에서 수여하는 건국훈장 서훈등급 3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돼 있지만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공적에 맞게 상훈을 격상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그의 고향인 천안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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