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76)

‘백설이 잦아진 골에 베옷에 버선 벗고 / 분묘 위의 눈 쓸다가 비 안고 우는 뜻은 / 어디라 발 시려 우리오 말씀 아니하실새 우노라’
조선조 중기 때 사람 김응정(1527~ 1620 )이란 이가 지은 ‘소분설(掃墳雪 -묘지의 눈을 쓸다)’이란 시조다. 어버이 묘소 위의 눈을 베옷과 버선 벗고 빗자루로 쓸다가 비를 안고 우는 것은, 발이 시려워 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아무 말씀 없으시니 그것이 서러워 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효자였다.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34세에 아버지상(喪)을, 그 3년 뒤인 37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그는 아버지상 때 3년, 어머니상 때 3년, 도합 6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죽만 마시며 아침저녁으로 절하고 슬퍼하며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지금이야 가당치도 않은 일일 뿐더러 그처럼 당시 전통사회 정신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유교문화와 효의 개념이 이제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 재산을 둘러싼 가족간, 특히 부모-자식 간의 법적 갈등으로 가족공동체마저 단숨에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효도 계약’이다. 국회에서는 ‘불효자 방지법’도 발의됐다.

우리 사회에 ‘효도 계약’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15년 이다. 그해 12월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신다는 조건으로 부동산을 물려받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재산을 다시 부모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즉, 자식이 ‘효도 계약서’에 명시한 효도 조건을 어길 경우, 부모가 증여계약을 해제해 재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불효자 방지법’에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윤리·도덕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영역에 있던 효도가 경제문제가 얽혀 있는 법과 계약이라는 현실적 영역으로 들어 선 것이다.

심지어 이 분야 전문변호사들은, ‘좋은 효도 계약’의 모델도 제시한다. △막연한 부양이 아닌 구체적인 조건, 정기적인 금전지원 내용 등을 명시하고 △모든 자식들의 양해, 동의는 필수이며 △자식 부부의 합의 확인 △자식의 배우자나 다른 자식을 연대보증인으로 하는 안전장치 마련 △효도의무 불이행시 재산을 반환한다는 내용 명기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부동산에 대한 관리 처분권한은 부모에게 있다… 등등의 조건들을 문서화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재산’과 ‘효도’를 맞바꾸겠다는 ‘효도 계약서’ 고유의 목적이라면,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다. 아직 살아계신 부모님 재산을 미리 넘겨달라고 요구하는 자식에게서 효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문득 저 유럽의 발트해 연안에 있는 에스토니아의 오래된 격언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품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품안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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