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47)

▲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 포스터(1964년)

한국 청바지 유행은
영화 ‘맨발의 청춘’서
신성일이 불붙였다

신성일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놀람과 애틋함으로 그와 작별했다. 그에게는 많은 미사여구가 붙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데뷔한 이래 반세기 동안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이끌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뿐만 아니라 극중의 그의 패션은 이 나라의 패션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청바지의 유행이 그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청바지가 미국 서부 금광 노동자들의 작업복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제임스 딘이 입고 나오면서 미국 젊은이들에게 주목 받기 시작했고,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말런 브랜도 같은 스타들이 즐겨 입으면서 점차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에 청바지가 처음 소개된 건 1950년대 한국전쟁 무렵 참전 군인들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엔 푸른색이 마치 교도소 죄수복처럼 보여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신성일, 엄앵란이 출연한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청바지를 입은 신성일이 불을 붙이며, 통기타 문화와 함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청바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바지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바지 시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구호물자 시장을 뒤져야했다. 60대의 한 여성은 중학교 시절 몰래 책값으로 청바지를 샀으나 종손인 그녀의 아버지가 “도대체 사대부 집안에 어디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냐”며 그 바지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렸다는 증언도 있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한 시대를 풍미한 70년대 청춘 아이콘 양희은도 “다리에 무슨 흠이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신성일은 평생 청바지를 애용한 배우로도 유명하다. 엄앵란의 팔순잔치에서도 드레스 코드가 ‘청바지’였다. 초대된 사람들에게도 청바지 차림을 주문했고, 부부는 이날 청바지를 맞춰 입고 블루스를 추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사망 한 달 전에도 청바지에 재킷을 입고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 나타났었다.

1964년 엄앵란 신성일은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던 것 같다. 결혼 후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모습은 보기 힘들었고, 결혼 10년 뒤부터는 이미 별거해 따로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또한 신성일은 엄앵란과 결혼한 후로도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까지 낙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까지 당당하게 공개했다. 엄앵란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던 결혼생활을 말하곤 했다. 그녀는 한 TV방송에 출연해 “(사람들이)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한다. 신문에서 언급한대로 이혼했으면 50번은 족히 했을 것이다”, “그는 집 밖의 남자다”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그 남편의 죽음을 맞이했다. 엄앵란은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꿋꿋이 키워냈다.

신성일에게 붙은 좋은 별명이 수없이 많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평생 아픔과 한을 안겨준 남편이었다는 점에서 아픔이 남는다. 가정을 이뤘으면 남편도 집안의 남자여야 한다. 신성일은 그런 안타까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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