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뛰어다니는 퉁퉁이를 보며
함께 달리고픈 나 또한
시원한 해방감을 맛본다

밤이 끝나고 아침의 시작점은 언제나 신비롭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져 잿빛 창고 지붕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이 보이고 낙엽이 져버린 가지 사이 휑하니 뚫린 공간으로 바람이 제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다가 오늘 아침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는 미세먼지가 아침안개와 함께 고여 있다. 겨울로 가는 올해 끝자락의 가을이 을씨년스럽고 왠지 스산하다.

새벽부터 어딘가에 있을 퉁퉁이를 찾아보려고 이층 베란다에서 농원을 살피는 중이다. 엊그제 개 목줄을 꿴 핀이 부러지는 틈을 타 퉁퉁이가 드디어 탈출을 감행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개집에 넣고는 유인을 해도 어림도 없다. 이틀은 개집 안에 둔 사료와 먹거리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올 1월 하순 경에 우리집에 온 퉁퉁이는 원래 산 속 목장에서 낳아 키우던 강아지라 방목을 했고 야생성이 강한 개였다. 처음 우리집에 와서 목줄을 채우려 할 때 달아나 근 3일만에 겨우 잡아 매어두고 한 해를 키워왔다. 그런데 퉁퉁이는 평소에도 매여 있는 게 즐겁지 않는 개였다. 사춘기 반항아처럼 개집 앞 마당을 매일 여기저기 50㎝ 이상의 깊이로 파는 것이 일상이었고, 날이 추워져 볏짚을 개집 안팎에 깔아줘도 잘 때를 빼곤 앞발을 구르며 밖에 노상 서 있었다. 질주본능이 여실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살던 제 집을 감옥처럼 여겼는지, 밥도 물도 마다하고 어디론가 떠다니다 3일째 개집 안에 둔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다녀도 제 집 아닌 곳에선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안 것인지... 남편이 현관문만 나서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며 약을 올린다.

4~5년 전 봄날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포장길에 하얗고 작은 솜털 같은 뭉치 하나가 살래살래 올라왔다. 나는 소리 없이 다가와 내 품에 동그랗게 안긴 ‘말티즈’를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수소문 해보니 누군가 버리고 간 유기견이란다. 목욕시키고 지저분한 털을 깎고 동물병원에 데려가니 이빨을 보곤 나이가 꽤 든 할머니 말티즈란다. 겉보기엔 작고 귀여운데, 집을 지키는 커다란 복동이보다 나이를 더 먹었단다. 남편은 애완견이라도 방에서 키우기를 싫어해서 현관에 작은 전기장판을 깔고 함께 살았다. 살면서도 내내 현관에 말티즈 배설물을 치울라치면 ‘얘를 어쩌지’ ‘얘를 어떡하니’ ‘안 돼면 유기견센터로 보내야지 뭐~’ 하면서 하루 하루가 가고 남편은 “쟤를 어쩔꺼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그럼 이름을 ‘어쩔꺼냐’고 부르면 돼지 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집 말티즈는 이름이 ‘어쩔꺼냐’가 됐다.

우리 이웃이나 드나드는 친구에게 얘 이름은 성은 ‘어’씨요, 이름은 ‘쩔거나’라고 소개하면 모두가 웃었다. 저도 그게 제 이름인줄 알아 ‘쩔거나’하고 부르면 귀를 쫑긋하며 달려왔었다. 그러던 와중에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삼년이 되던 봄에 먹을 것을 입에 대지 못하더니 명을 다했다. 남편은 뒷산에 그의 애매한 이름과 함께 고이 묻어줬었다.

나는 퉁퉁이가 이전 우리가 키우던 개와는 다르다는 건 안다. 집안에서 매어 키워야 하는 개가 풀려서 혼자 떠돌다 무슨 일을 당하지나 않을지 몹시 걱정스럽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어려부터 산으로 돌아다녔던 야생의 기억을 가진 개를 하루 종일 아니 일 년, 그 평생을 제자리만 지키며 집안의 초인종 구실만 시키며 변형시키는 것도 인간의 지독한 이기심이 아닌가 싶다. 이미 풀어진 것 며칠이라도 자유롭게 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뛰어다니는 퉁퉁이를 보며 함께 달리고 싶은, 나 또한 속 시원한 해방감을 맛보는 듯하다. 남편 목소리다. “어딨어? 배추 뽑아왔는데~” “내려가요~”
나까지 너무 자유롭고 싶어졌나,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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