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운가 보다

온 몸에 미적지근한 게 눌어붙어 있다. 딱히 꼭 집어서 어디라고 말하기도 그런, 미열과 뻐근한 근육들과 돌을 이고 있는 듯 한 무거운 머리와 쿨럭일 때마다 울먹거리는 가슴과 깔끄러운 목구멍, 후끈거리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도 따뜻하지가 않다.
해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통과의례처럼 한 차례 감기를 앓곤 한다. 첫 추위가 올 때,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 때만 해도 괜찮길래 올해는 무사히 넘어가나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만했나보다. 인간은 아무리 자신을 낮춘다고 해도 떨어지는 낙엽만큼 겸손할 순 없나보다.

큰딸이 서울로 저장고 하나를 가져가는 바람에 남은 저장고 물청소를 하고 배를 옮기고, 그리고도 남는 것들을 넣어두려고 잡동사니와 함께 묵혀놓았던 황토방까지 대청소를 했다. 아침마다 계획을 세우고 오늘은 이것까지, 내일은 여기까지, 평소하지도 않던 일거리로 꽉 찬 며칠을 보내다보니 늙은 몸에 무리가 왔나보다. 나는 해야 할 일에 대한 성취감에 들떠서 항상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한다. 게다가 남편까지 독려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깜냥을 알지 못한데서 오는 교만이 아니겠는가. 남편이 병원에 가보라는 권유에도 “종합감기약 사놓은 거 있으니 먹어 보고.”라며 낫기를 기대하며 미뤄왔다.

게다가 모처럼 우엉차를 만들 욕심으로 한나절 힘든 우엉 캐기에 도전했다가 별반 소득도 없이 온 몸에 우엉씨만 잔뜩 붙이고 와선 황토방에서 정리한 잡동사니를 모두 태웠다. 여행 중에 모았던 일정, 책자, 메모, 편지, 엽서 등등 그때는 소중했을 기억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는 일에 그리 필요치 않은 것은 낙엽을 태우듯이 모두 태웠다. 이렇게 자신을 비우며 잊으며 가는 게 아닌가. 감기를 앓으며 왠지 모를 감상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불씨가 남아있는 잿더미 위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몸이 아파서인가, 가을이어서인가, 자신에 대한 무책임 때문인가, 버리고 가기엔 미련이 남아선가, 알 수 없는 연민에 눈물이 터진다.

약간 콧소리가 섞여나는 목소리다. “넌 어려서 백일해를 앓아 평생 감기 조심해야 해.” 집을 떠나 서울서 대학생활 할 때나, 부산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을 때나, 결혼해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 키워올 때도 늘 하시던 말씀이다. “넌 남달리 기관지가 약해. 그러니 찬바람 불면 바로 옷을 따숩게 입고 목도리를 꼭 하고 다녀라. 내가 보내준 거 있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목소리가 좀 이상하기만 해도 “너 또 감기 걸렸제~ 조심하지. 병원엔 갔냐?”라며 걱정하시던 엄마 목소리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운가 보다.

황금빛으로 황홀하게 물든 배나무 낙엽도 거의 다 떨어지고, 이제 그 색이 바래 다니던 길을 모두 지워버렸다. 오늘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집안일 다 내려놓고 음성으로 병원에 가야겠다. 집 앞 콩밭에는 세워 접은 우산대처럼 콩줄기가 뾰족뾰족하게 낫을 기다리고 있고, 앞산 낮아진 능선 아래로 멀리 푸른 무청과 김장 배추만 파랗다. 빈 논 벼 벤 그루터기에 새로 돋는 움벼를 보며, 오늘 햇볕이 맑고 바람이 산산해서 병원 가는 길이 마음 따라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는 여행길이 될 것 같다. 아마, 오늘은 쉽사리 집에 돌아오지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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