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지난 여름 죽지 않고
살아준 것만도…
그 이후 비로 이만큼이라도
굵어진 것만도 고맙다

지도에도 없는 안개바다 위로 외딴 섬같이 떠도는 안개에 포로가 돼버린 이른 가을의 새벽이다. 곧 해가 뜨면 안개도 스러지겠지. 안개가 짙은 날 외려 한낮은 햇빛이 좋다고 했으니 드디어 오늘 배식초를 담가야 하는 날이고 일꾼을 위해 튼실한 밥상을 먼저 마련해야겠다. 명절에 남겨둔 돼지갈비찜도 끓이고 무청도 삶아 된장 들기름에 지지고 햇콩을 두어 밥도 한 솥 해야겠다.

우리집 배과수원엔 다섯 종류의 배나무가 있다. 주종은 신고배이지만 서로 수정이 잘 맞는 수분수로 원황, 감천, 화산, 황금배가 신고 사이사이에 섞여 심겨있다. 그 중에 원황과 화산과 황금은 추석 전후로 따는 조생종이라 저장이 잘 안 되고 수확한 지 열흘만 지나도 상할 수 있어 빨리 소비해야 한다. 10월에 따는 신고와 감천은 만생종이라 저장고에 넣어 보관하면 이듬해 봄까지 저장이 된다. 우선의 문제는 먼저 익은 조생종 배중에 굵은 것을 따서 추석에 쓰고, 나머지를 모두 따고 보니 대부분 배 사이즈가 작아 쓸 만한 크기가 없다. 싱싱할 때 빨리 식초라도 해야 한다.

배농사를 하다 보니 명절 후 겨울에 남은 배가 항상 문제였다. 그러다 농업기술센터에서 막걸리를 빚고 그걸로 식초도 만들고 하면서 모든 과일이 식초가 된다는 걸 배웠다. 그때부터 배식초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3년 전에 담아놓았던 배를 먼저 걸렀다. 3차에 걸쳐 식초를 걸러 마지막 항아리에 넣을 땐 처음 담는 양의 1/5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비워진 통을 말끔히 씻어 닦아놓아서 다시 그 통을 쓰는데, 식초는 담았던 그 용기만 계속 사용한다. 오늘 햇배로 다시 가득 채워 넣기 위해 배를 씻고, 반으로 자르고 물기를 빼고 25㎏ 컨테이너로 날라서 용기에 채운다. 사이사이 배의 분량에 맞게 설탕을 섞어 뿌리면 이번에 담글 양도 컨테이너 25㎏로 35~40개 정도 될 것 같다. 올해는 유독 심한 가뭄과 폭염으로 열매가 잘다보니 식초 담을 것만 늘어났다. 그러나 어쩌랴.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죽지 않고 살아준 것만도, 그 이후 비로 이만큼이라도 굵어진 것만도 감사하고 고맙다.

배식초를 담그는 공간이 따로 없다. 마당 가장자리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사철을 지내며 3년을 둔다. 식초를 걸러 항아리에 옮겨서도 여전히 밖에 두고, 1년 정도 항아리에서 숙성이 되면 초막이 적절하게 덮인 배식초가 완성되고 비로소 음용하게 된다.
식초는 발효가 시작되면서 1년쯤 지나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고 마지막에 알코올을 통해 초산 발효가 일어난다고 알고 있다. 더워야 초산발효가 잘 일어나는데, 우리집은 여름이 짧고 겨울이 더 긴 산골마을이라 그 과정이 매우 더디다. 처음 담가 먹기까지는 최소 4년 이상이 걸린다.

막걸리 찌꺼끼에 물을 타서 과수원에 뿌리면 좋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우리도 배를 거르고 난 찌꺼기를 물에 희석해 봄가을로 두 번 뿌려줬다. 그 다음 해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당시 배에 흑성병(배에 검은곰팡이 같은 검은 점이 생김)이 유행이라 주변 모든 과수원마다 야단이었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백약이 무효였다. 아무리 크고 잘생긴 배라도 검은 점이 박히면 상품이 안 돼서 우리도 고민이었다. 생각 없이 뿌린 식초 찌꺼끼 때문인지도 모르게 다음해 우리 배에는 흑성병이 사라졌다. 혹시 하며 그 해도 그 다음 해도 계속 뿌렸더니 올 해는 흑성병만 아니라 배부스럼증도 거의 다 사라졌다. 다른 과수원엔 아직 여전한데.

토양을 개선하는 유용한 식초의 효능은 사람의 체질도 바꾼다고 한다. 배식초를 담그느라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훔치며 팔다리가 저려도 맘이 밝고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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