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63)

아침 창문을 여니 삽상한 바람으로 덜미가 서늘하다. 투명한 아침햇살은 기울기가 한뼘쯤 낮아졌고, 푸른 하늘은 가없이 멀어져 눈이 부시다. 너무도 지독해 살아내기 힘들었던 폭염은 온데간데 없다. 풀섶에 흰이슬이 내린다는 백로 절기 보낸 지 고작 한이레 인데 아침 저녁이 다르게 가을빛이 완연하다.

‘소년이로학난성/일촌광음불가경//미각지당춘초몽/계전오엽이추성’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아주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못 가 봄풀은 꿈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았는데/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이 시는 중국 남송(1127~1279) 때의 대유학자 주자의 ‘권학문(勸學文)’ 시다. 봄풀(소년)은 오동잎(늙은이)으로 늙기쉬우니 촌각이라도 아껴서 공부를, 배우기를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불현듯 뜰앞 오동나무의 서걱이는 가을소리를 듣는 것 같은 서늘한 초가을 아침이다.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소리를 내면 비어오는/사랑한다는 말을/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서걱이는 풀잎의 의미를 쓰다듬다/깔깔대는 꽃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이해인의 ‘가을 노래’)
그리고 사람들 누구나가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고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김현승의 ‘가을 기도’)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란 시다. ‘이 세상 어디엔가 보이지 않는 꽃과 풀잎처럼 하찮은 존재같지만, 그로해서, 그가  있음으로 해서 눈부신 아침과 고요한 안식이 있는 저녁이 온다. 부디 아프지 마라’고 절절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너’ 혹은 ‘나’가 그대들 가슴에는 있는가…

그렇다면 단 한줄로 된 함민복의 시 ‘가을’ 구절을 가슴에 품어도 좋을 것이다. 이 가을에는.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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