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기획연재
돌성 사이 꽃피운 안흥성 마을■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상 수상작 - 충남 태안 정경자씨의‘꽃피는 성안마을 안흥성 이야기’
민동주 기자  |  mdj02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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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31  11: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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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피는 성안마을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충남 태안군 정경자씨의 글을 싣는다.

동북아 해양문화가 숨 쉬는 꽃피는 성안 마을 안흥성 이야기

 꽃처럼 포근한 주민들이 사는 안흥성
 갯벌이던 자리, 마을 이뤄 농작물 재배

주위에 바닷물이 들어오고 꽃게를 가득 실은 고깃배가 들어오고 백제시대 중국의 문물이 들어오고 고려시대 청자를 실은 청자운반선이 들어오며 송나라와 명나라의 사신들의 배가 정박을 하던 동북아 해양 문화가 숨 쉬었던 안흥성, 꽃피는 성안 마을 이야기를 아시나요? 지금부터 제가 사는 충남 태안군 근흥면 안흥성의 작은 성안마을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네 개의 산봉우리를 포곡식으로 돌을 쌓아 만들어진 안흥성에는 조용한 성안마을이 있습니다. 이 성안마을 옆에는 꽃게로 유명한 태안의 대표적인 항구이자 고대 동아시아 해양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안흥항이 있는 곳입니다.

한반도의 허리인 충청남도 서북쪽 백두대간의 금북정맥을 따라 서쪽 끝 막내인 지령산이 서해바다로 뻗어 있는 지역인 이곳은 예전부터 안흥항이라는 이름의 항구가 있는데 이 항구 앞을 지나는 물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예전부터 지나다니기 어렵다는 뜻의 ‘난행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관장수도, 관장목으로 불리는 안흥 앞바다는 바닷물이 뒤집어 지듯 휘돌아치며 흐르는 곳이기에 손돌목, 울돌목, 장산곶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물길이 험한 곳으로 유명하지요. 너무나 잦은 배들의 침몰로 이름에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편안할 ‘안’자에 다닐 ‘행’자를 붙여 ‘안흥량’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것이 항구의 이름으로 전해질 정도로 다니기 험한 바닷길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 이 곳을 지나는 배에 선원을 모집하면 선원들은 모두 침몰할 것을 두려워하여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거부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항간에는 “안흥량이 잔잔해야 나라가 잔잔하다”라고 해 단군영정을 모셔와 섬기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안흥의 항구는 내항과 외항으로 나눠있습니다. 지금은 고깃배와 유람선 그리고 횟집등 번화한 항구로서의 역할을 새로 만들어진 안흥 외항인 신진도항에 넘겨주었지만 안흥외항이 만들어지기 전, 안흥내항은 중국과 가까워 사신들의 왕래와 문화적 교류의 주요 교통로로 서해안의 해상 교역로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항주를 출발해 개경으로 향하던 중국 사신들이 물과 양식을 보충하는 중간기착항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안흥항 앞바다는 무신정권시절 강진을 출발해 강화로 가던 청자운반선이나 조선시대 백자운반선이 바다의 해류로 인해 다량으로 침몰한 고선박과 해저유물들이 인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안흥항을 통해 무역은 물론 중국의 북제형식의 불교문화도 들어와서 586년 백제의 성왕시대에 커다란 바위 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하는 마애불을 조성하는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의 마애삼존불입상을 태안의 주산인 백화산에 조성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가운데에 모시고 깨달음을 가진 석가모니 여래 두 분이 좌우에 협시를 하고 있는 국보 307호인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우리나라 마애불의 효시이자 굴을 파고 부처님을 모시는 석굴사원 형식을 시도했던 최초의 불교문화재입니다. 이 마애불은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의 용현리마애삼존불입상에 조성 기법을 전수해 주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기법은 굴속에 부처님을 모시는 신라시대의 문화유산인 석굴암을 만들게 되는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건축한 한국 불교문화유산들이 건립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한 곳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지요. 또한 안흥항 바로 옆에 위치한 안흥성은 성동산을 중심으로 바닷물에 둘러싸인 지형적인 형상으로 전형적인 천혜의 요새로서 서해안 해안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태안은 고려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서해안의 여러 곳 중에 하나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왕성했던 해상무역의 중심인 한중일의 무역선이 지나는 요충지였고, 고려시대는 강진에서 생산했던 청자들을 왕과 귀족들이 사는 개경으로 운반하기 위한 청자운반선이 지나던 곳이었기에 강진, 군산, 강화, 벽란도와 더불어 왜구의 출몰이 빈번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에 서해안 방어를 위해 수군이 주둔했던 곳으로서 고려시대에는 요아진이 있던 곳입니다.

고려 말에는 너무 많은 왜구들의 잦은 침약으로 주민들이 약탈과 피살을 당하자 공민왕 22년에는 더 이상 왜구의 괴롭힘에 못 견디고 태안 군수가 몇 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으로 피해 가서 태안군이 폐군(廢郡)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태종이 왕권을 잡고 정국이 안정되자 왕위를 세종에게 넘기면서 태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대마도에서 빈번하게 할거하는 왜구들의 진압이었을 정도입니다. 이후 세종대왕이 왕위를 물려받고 세종 12년인 1467년 소근진첨사에서 안흥량수를 파견해 ‘좌도수군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을 뒀고 세월이 지나 조선 효종때 성을 쌓으면 좋겠다고 김석견이 청원하자 효종이 지경연사 이후원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 지역이 바다에 가려져 있고 포근하게 둘러쳐진 산등성이를 따라 천혜의 요지이기에 성을 쌓아 왜적을 방비하기에 좋고 특히 조운선이 지나가기 험난한 태안의 앞바다 관장목의 지리적 여건상 침몰이 잦던 조운선의 양곡들을 임시 저장하기에 적당하다는 의견을 내 놓자 충청감사에게 명해 태안을 비롯해 멀리는 청주나 충주등 19개 군민을 동원하여 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효종 6년인 1655년은 임란과 호란을 겪고 주변국인 중국의 왕조가 바뀌는 혼란했던 시기였기에 효종은 북방정책을 주도했으며 몸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던 쓰라린 경험으로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완성된 안흥성의 서문밖에는 특별하게 거북선까지 배치할 정도로 중요한 방어지였습니다. 1500미터를 돌아 3.3미터의 높이로 쌓여진 안흥성은 현재까지 보존이 된 동·서·남·북 4개의 문을 갖고 있으며 서문 위에는 유일하게 문루가 복원돼 있는 수홍루라는 문루가 있습니다.
현재 방조제가 조성돼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간척지로 이용되고 있지만 고지도를 보면 서문 밖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고 병선과 방선을 비롯한 거북선이 배치됐던 곳입니다. 이 안흥진성에는 첨사무종 3품인 수군첨절제사를 비롯해 군졸이 300여 명 이상 주둔했던 큰 규모의 수군이 배치됐습니다. 드리울 수에 붉을 홍이라는 뜻을 가진 수홍루는 앞 바다로 떨어지는 해넘이 풍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휘돌아가는 물길에 수많은 배들이 침몰했기에 관장목, 관장수도, 난행량, 안행량, 안흥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세곡을 실은 배와 청자나 백자를 싣고 오던 배가 침몰해 중앙정부의 애를 태웠던 바다는 지금도 돌아가는 물길로 선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곳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바닷길을 피해 보려고 세계 최초로 고려 인종 12년부터 조선 현종 10년까지 535년 동안 선조들의 열망을 담아 굴포운하를 굴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양쪽에서 뚫어 오던 운하는 가운데 3km정도의 암반석 때문에 성공을 하지 못하고 미완의 운하건설이라는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곳이 됐습니다. 고려시대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수납된 조곡을 배를 이용해 운반했습니다. 서해 즉 보령 앞바다에서 태안의 안흥량을 거쳐 당진의 난지도 서쪽을 반드시 거쳐 수도인 개경의 예성강 하류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집결됐기 때문에 태안의 관장목은 매우 중요한 해상운송로였습니다.

특히나 안흥의 앞바다는 태조 4년, 5월에 경상도 세곡선 16척이 침몰했고 태종 3년, 5월에도 경상도 세곡선 34척과 6월에 30척이 침몰해 선원 1000여 명과 세곡 1만석이 수장됐다고 하며 태종 14년 8월에만도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침몰한 기록으로 봐 당시 항해술로 좁은 수로와 암초에 부딪혀 수많은 피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 인종 때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태안의 인평리와 서산의 어송리에 이르는 운하굴착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암반이 물 밑에 있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파고 메워지기를 거듭해 3km 정도를 파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고려시대에 2차에 걸친 시도도 실패하자 태조 때 다시 시도됐고, 태종 때는 하륜이 갑문식 굴착을 시도해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으나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조급해진 태종이 후에 세종이 될 충령대군을 데리고 독려를 하기도 했으나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고 조선 현종 때 다시 논의됐습니다.
송시열은 안면도에 운하를 파서 배가 천수만을 통과해 굴포운하 굴착지 근방인 남창에 세곡을 내려놓고 우마차로 북창까지 운반한 후에 가로림만에서 다시 배에 싣고 운항해 한양까지 운반하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너무 번거로워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안흥진성의 서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백제무왕 때 창건되고 세종 때 중창된 태국사가 보입니다.
‘국태민안‘이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나라를 생각하는 호국의 사찰로서 중국사신의 무사항해를 빌었고 국란 시에는 승병을 관할했던 사찰입니다. 주승이 수막대장의 명을 받아 수군이 있는 19개 읍면에서 모인 승병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그 것은 첨절제사와 같은 지위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꽃을 사랑하는 주지스님이 철마다 아름다운 꽃을 가꾸어 꽃피는 성안마을을 만들고 계십니다.

   
▲ 안흥성 북문

안흥진성 4개의 문중에는 TV의 코미디 프로 이름과 비슷한 감성루라는 이름의 문루가 있던 북문이 있습니다. 보이는 성밖 마을의 풍경은 조용한 농어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전원풍경을 보여주지만 원래 바닷물이 들어왔던 갯벌이었습니다. 지금은 간척이 돼 성밖 마을의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고 안흥성 그리고 안흥 내항과 외항을 오가는 차들이 빈번히 오고가는 직선의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있습니다.

성문 앞에는 지금은 없지만 나무로 만든 성문을 받쳤던 작은 구멍 뚫린 확돌이 옛 안흥성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북문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면 사라진 문루 아래 자그마하게 남문이 멀리 보입니다.
북문을 지나며 동문으로 가는 길목에 보이는 집이나 밭은 예전에는 동헌이나 관리, 수령의 거처 또는 책방이 있던 곳입니다. 먼 옛날 송나라 사진이 적은 글귀에 고려에 가면 꼭 안흥에 들려 아름답고 호화로운 300여 채의 집들을 보고 오라고 했답니다. 그 시절의 중국인들은 부러워했지만 이제는 그런 조상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는 그리운 곳이 됐습니다. 상상을 더하면 진짜가 보인다는 말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지나가다보면 만나는 곳이 안흥진성의 동쪽 문입니다. 이 곳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을 볼 수 있습니다.

   
▲ 안흥성 서문 수홍루

서문․북문과 남문은 기다란 장대석을 얹어 놓은 밋밋한 방식의 평거식으로 축성된 문에 비해 안흥진성의 동문은 아치형의 아름다운 홍예식으로 축성됐습니다. 지금은 국방과학연구원의 소유로 철조망에 가로 막혀 있어 동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예전에는 이 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에 접해 있어서 물이 들어오는 시각에는 이 동문으로만 외부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안흥항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문물이 이 동문을 통해 태안으로 유입됐고 내륙으로 전파됐던 문입니다.
아쉬움을 안고 동문에서 발걸음을 옮겨 남쪽으로 향하는 봄이면 안흥 바다의 해무가 밀려오면서 메밀꽃처럼 생긴 하얀 꽃들이 반겨줍니다.

5월이 되어 사상자꽃이 만발한 동문에서 남문으로 가는 이 길은 왠지 걷기만 해도 건강을 선물해주는 느낌을 받는 곳이지요. 복파루라는 문루가 있던 남문 밖을 나가면 성의 축성에 동원된 석공의 출신지인 청주라는 글이 남아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실명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남문의 성벽 쪽으로 높은 곳은 서산의 도비산과 북주산으로 봉화를 올려 왜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대가 있었으며, 1750년에 그려진 해동지도를 보면 남문 성밖 아래 항구 쪽에는 농작물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답니다.

다시 남문을 통해 성안마을로 들어서면 지금은 집들과 주민센터 그리고 우물이 남아 있는 곳으로 오게 되는데 예전에는 사령과 장관 그리고 아전들이 거처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물이 5개나 있었으니 안흥진성의 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큰 안흥성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목재로 만든 건물들은 모두 소실돼 지금은 돌로 쌓은 문과 성곽만이 남아있고 안흥성과 항구, 바위와 섬과 안개 그리고 바다가 갖고 있는 이야기들은 안흥8경으로 전해집니다.

1경. 삼도신루(三島蜃樓)
   장마철 안흥성 앞에 있는 3개의 섬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신기루 현상.
2경. 곡암낙조(曲岩落照)
   마도 뒤 여자바위 꼭대기에서 즐기는 낙조 풍경
3경. 관정귀범(串汀歸帆)
   만선을 이룬 돛단배들이 저녁 무렵 관장수도 주변으로 귀선하는 모습
4경. 장사백구(長沙白鷗)
   신진도 긴 백사장에 흰 괭이갈매기가 내려앉은 모습
5경. 능허추월(陵墟秋月)
   신진도 능허대 위로 떠오르는 가을 달빛
6경. 남포어화(南浦漁火)
   꽃이 핀 것처럼 남포등을 켜놓고 조기잡이 하는 모습
7경. 태국종성(泰國鐘聲)
   태국사의 종소리
8경. 지령모하(芝靈暮霞)
   5~6월 지령산에서 바라보는 바다 안개.


한반도 속의 작은 반도인 태안반도의 어촌과 농촌 마을이 혼재한 태안의 안흥지역은 풍성한 먹거리로도 유명합니다. 황토로 이루어진 밭에는 토종 6쪽 마늘이 자라고 달고 맛있는 황토호박고구마와 황토밭의 달래가 지리적 표시제 인증을 받았습니다. 안흥성이 있는 근흥면에는 세계 슬로우 푸드에 등재된 우리나라 전통소금인 끓여 만드는 소금, 자염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안흥 내항은 자연산 우럭등을 낚기 위해 바다낚시를 하려는 관광객들이 몰려옵니다. 안흥 외항은 안흥8경을 볼 수 있는 유람선과 태안에서 유일하게 주민이 사는 가의도행 여객선이 출항합니다. 1월부터 12월까지 끊임없이 맛있는 수산물을 싣고 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국가 1등급 항입니다.

태안에 봄이 오면 빈혈과 간에 좋은 바지락이 살을 키우고 진달래꽃이 필 때면 가장 맛이 있는 쭈꾸미가 잡힙니다. 이어서 속이 꽉 찬 쫄깃쫄깃한 갑오징어와 실치가 나오고, 보리가 익어가는 5월에는 알을 품은 밥도둑 암꽃게가 안흥 외항으로 들어오며 전국의 관광객들이 탱글탱글 하면서도 비린내가 없는 게살의 깔끔한 맛을 느끼기 위해 안흥으로 오십니다.

6월이 돼 보리가 익어 갈 때면 자연산 우럭이 찰진 기름기를 머금고 초여름 갯벌의 산삼인 낙지가 나오기 시작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맛 놀래미와 여름을 담은 농어가 이어지며 바다의 산삼인 해삼이 축제를 기다립니다. 이어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주는 여름 최고의 보양식 붕장어와 동해에서 방향울 바꿔 서해의 태안으로 몰려오는 오징어가 안흥항을 북적이게 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오면 조개의 황제인 전복이 올라오고 안흥항 갯벌에서는 쫄깃쫄깃 개불을 잡기 위한 안흥마을 주민들의 삽이 바빠집니다.

이어서 가을철 30cm 내외로 자란 입에서 사르르 녹는 자연산 대하를 빼 놓을 수 없네요. 그리고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뼈째 먹는 가을 전어도 있어요. 이제 날이 점점 더 추워지면 안흥외항 앞의 가의도 바위에 붙어 깨끗한 바다가 키워낸 홍합이 나옵니다. 맛이 달고 성질이 따뜻해서 피부를 매끄럽고 윤기 있게 해주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동해부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겨울이 오면 물메기탕의 재료인 물텀벙이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살을 발라 데쳐먹는 황금 조개 새조개의 계절이 옵니다. 이어 민물과 바닷물을 왔다갔다하면서 맛을 키운 숭어가 태안의 황금 식재료와 어울려 겨울철 추위를 녹여줍니다. 이제 고단백, 겨울의 왕자, 바다의 우유인 굴이 진가를 발휘하는 계절이 되었네요. 생굴로 물회로, 구이로, 무침으로, 굴밥으로 변화무쌍하게 안흥지역 주민들의 지친 입맛을 돋워 줍니다. 이제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추운 겨울에도 바다를 누비며 10월부터 2월까지가 최고의 맛을 보여주는 콜라겐 덩어리, 광어인 듯 광어 아닌, 넙치인 듯 넙치 아닌, 태안의 방어로 간자미를 먹을 계절입니다. 겨울철 안흥외항의 배들은 이런 간자미를 실은 배들로 넘쳐납니다.

태안은 유독 중국과도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곳입니다. 특히 안흥지역은 중국에서 사신으로 들어오다가 험한 태풍과 급류를 피해 살았다는 가씨라는 성을 가진 중국인의 이야기가 있는 가의도라는 섬도 있습니다. 또한 가유약이라는 명나라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안흥항을 통해 들어와 조선을 위해 싸웠고 정유재란 때는 아들과 손자까지 데리고 다시 입항해 왜군과 싸우다 아들과 함께 부산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손자인 가침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중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안흥항에서 오랜 기간을 기다렸으나 태풍이 심해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다가 태안에 정주를 해 소주 가씨를 이루게 됐습니다.

이렇듯 서해안 방어의 중요한 요충지인 안흥성과 안흥항은 선조들의 지혜로운 해양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의 문물과 사신들이 왕래하던 곳이며 왜구의 침입을 막고 위험한 항로를 피하기 위해 다목적 성을 쌓았고 800년 전 침몰한 선조들의 고선박과 해저유물들을 건져내고 있는 곳입니다. 쭈꾸미를 잡으려고 던져 넣은 주낙에서 걸려나온 청자 한 개로 인해 고려시대의 청자운반선들이 인양됐고, 해양문화의 쇠퇴로 해로운항을 줄였던 조선시대의 배까지 인양되면서 안흥 앞바다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인양된 엄청난 양의 해저유물만으로도 그 가치가 높기 때문에 안흥항 앞에 해저유물전시관을 건립하고 있으며, 안흥내항과 외항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차후로 안흥지역은 동아시아 해양역사문화의 장소로 다시금 재탄생해 예전의 찬란했던 역사의 장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수중문화재 발굴과 새로 개관하는 해저유물전시관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며 많은 분들이 서해안에 있는 태안의 작은 항구에서 일어났던 자랑스런 동북아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  현장인터뷰

   
▲ 정경자 회원은 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전하고 있다.

“안흥성의 안전이 나라의 평화 불러와요”

 안흥성, 국제사회 잇는 중요한 장소
 왜구 침입에 나라 안보 흔들려…

슬로시티로 지정된 충남 태안은 숨은 이야기가 많다. 생활개선태안군연합회 정경자 회원은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면서 관광객에게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고 역사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태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펜을 들어 농촌스토리 공모에 도전했다는 정경자 회원. 태안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경자 회원을 안흥성에서 만나봤다.

“태안은 해수욕장이 20개 넘게 있어서 파도소리를 듣기 좋은 곳이죠. 해수욕장마다 스토리가 있고 참 아름다워요. 바다가 많아서인지 국내 유일의 해안국립공원이 태안에 조성돼 있어요.”
13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태안해안국립공원은 해안휴양지로 알려졌으며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 아담한 산봉우리, 침식작용으로 깎여 나간 해안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1978년 10월 태안 내 328.99㎢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현재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으며, 25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태안 명소 중에서도 안흥성은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장소예요. 옛날에는 바다 위 무역이 안흥성에서 이뤄지곤 했거든요. 조세무역선이 안흥성 주위를 지났는데, 물길이 거세게 휘돌아서 배가 곧잘 침몰해 다니기 어려운 난행량으로 불렸어요.”
안흥성이 국가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던 곳이어서 왜구의 침입 또한 많았다. 그로인해 안흥성에는 급박한 일이 벌어지면 봉화를 올려 주변 지역으로 알려줄 수 있는 봉수대도 설치돼 있다. 고려 말에는 왜구 침입이 극심해져 태조 이성계가 왜구 퇴치를 국가의 중요한 현안으로 삼으며 서해안 방어책을 펴기도 했다.

“태안 앞바다가 잔잔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사람들은 바다에 있는 항구 옆에 산을 따라서 4개의 돌성을 쌓았다.
“능선을 따라 지역에 돌로 성을 쌓아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땅이 됐지만 예전에는 다 물이 들어찼던 문이었죠.”
남문에 가면 그 시절의 실명제라고 할 수 있는 돌성을 쌓은 석공들이 이름이 적혀있다. 정경자 회원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듯이 옛날부터 이름을 남기려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고 유추했다.

안흥성 안에는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예전에는 수군이 머물던 갯벌지역이었는데, 현재는 마을이 조성되면서 지역민들이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경자 회원은 안흥성이 관광지로 많이 안 알려진 역사가 깃든 장소지만, 앞으로는 많이 알려진다고 자신했다.
“안흥성 주위로 물길이 거세 침몰했던 배에서 청자유물이나 조선백자 등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물들이 인양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 진전 등에서 안흥성은 부각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안흥성 지역 주민들은 모두 안흥성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전하며 민가와 어우러진 안흥성은 앞으로 관광자원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아울러 그는 안흥성이 아직은 옛날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앞으로 관광지 개발되면서 인위적으로 꾸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앞으로 안흥성이 테마시설로 꾸며지더라도 안흥성이 품고 있는 스토리에 관심을 갖고 먼저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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