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서울 한복판에서 본 것이
바로 병산서원에서 봤던
백일홍의 기억이었나…

새벽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지더니 강물은 검붉은 황톳빛으로 굼실굼실 흐르고, 용이 승천하듯 안개는 산골짜기를 타고 오르내리며 비를 뿌린다. 하늘은 쌀뜨물로 끓인 무국처럼 뿌옇고 먹먹하다. 이렇게 며칠은 비가 더 올 거라는데, 웬 가을장마?

기다리던 우편물이 있어 우체통까지 갔다가 배나무 사이로 배롱나무를 유심히 찾아보니 며칠 전만해도 붉게 가득 피었던 꽃이 비바람에 다 떨어졌는지 가지 끝에 몇 송이만 겨우 남아 있다. 엊그제 서울에 갔다가 길가 빌딩 입구에 알록달록한 단청을 곱게 입은 작은 정자 옆에 붉은 배롱나무가 고색창연하게 나지막이 가지를 늘이고 서있는 걸 봤다. 도심 한 가운데서 보는데도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풍경이 마음에 꽂혔다. 괴산집에 내려와 배롱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건 아주 오래 전에 강진 백련사에서 본 것 아니면 안동 병산서원에서 맞닥뜨린 그것이었나 보다.

15년 전쯤일까, 남편이 서울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우리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둘만의 여행이었다. 전국일주를 목표로 강릉에서 출발해 경주까지 가서 남해를 지나 해남에서 서해를 훑어 올라오는 것인데, 꼭 가고픈 곳을 몇 군데 정해놓고 무계획으로 길을 떠났다.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고, 경주 감포해수욕장 대왕암에서도 일출을 보고 고향 진해로, 친구가 많은 부산으로, 남해고속도로로 완도·해남을 거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 남도여행 일번지 강진으로 향했다. 혜장선사와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말에 백련사 앞마당에 아름드리 서있던 한 그루의 백일홍. 만개한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으로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그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괴산으로 내려온 후 안동 하회마을 구경을 갔었다. 그러나 관광인파에 밀려 하회마을을 들렀다가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동쪽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달려 아무런 소개도 없이 이정표 하나에 의지해 따라 길을 나서 15분 정도를 가니 낙동강변의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병풍을 드리운 듯 병산서원이 펼쳐졌다. 앞마당에 흐벅지게 핀 배롱나무. 만대루에 올라가 보니 서원 안쪽의 380년이나 됐다는 배롱나무 백일홍의 꽃그늘진 풍경은 서원의 추녀 끝과 어우러져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본 풍경 중에 백미는 병산서원의 배롱나무 백일홍이다. 병산서원 건축물 자체가 흙·나무·돌로 지은 자연이고 서애 유성룡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선비가 공부하던 두 세 평 남짓한 작은 방들. 공부하다 지루하면 만루대에 올라 반질반질하게 시원한 너른 마루에서 그림 같은 병산의 절벽 아래 낙동강 푸른 물줄기가 휘감아 흐르는 절경을 서로 시 한 수로 화답하고, 부는 바람 막힘이 없는 자유로움에 학문을 수련하고 도를 닦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서울 한복판에서 본 것이 바로 서원에서 보았던 백일홍의 기억이었나 보다. 자연친화적이며 인간친화적인 가옥과 제일 잘 어울리는 배롱나무꽃이라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백일이 유효기간인 배롱나무꽃이 더 늦기 전에 우리도 다시 가볼 참이다. 돌아볼 수 있는 오늘이 있음에 감사하며 지나간 시간에 감사하며 다시 길을 떠나 보려고 한다. 내일은 비가 그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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