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상 수상작 - 경남 산청 윤인숙 씨의 ‘우리 마을 점빵이야기’

▲ 마을점빵에는 본인들이 쓰지 않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직접 농사짓고 가공한 상품들도 진열돼 있는 마을의 보물섬과 같은 공간이다.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경남 산청군 윤인숙씨의 글을 싣는다.

택배조차 오지 않는 오지마을…주민들 생활에 어려움
정부 공모사업 선정 위해 ‘마을점빵’ 아이디어
쓰지 않는 물건 나눠 쓰는 재활용의 장으로 활용

우리 마을은 도시에서 온 귀농·귀촌인들이 10년 전에 만든 교육생태마을이다. 마을에는 대안중학교 학생 70여 명과 30가구 80명 정도가 살고 있다. 5년 전 아이가 이곳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마을 빈집에 세를 얻어 주말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집을 지어 정식으로 귀촌을 했다. 어쩌다보니 작년부터는 마을대표까지 맡게 됐다.

작년 초 군청의 한 공무원 전화를 받았다. 정부에서 하는 문화마을 공동체만들기 공모사업이 있는데 우리 마을이 그 사업에 적합할 듯 하니 한번 응모해보라는 것이었다. 정부 돈을 받으면 간섭받는다고 걱정해서 반대하는 주민도 있었으나, 이번 기회에 우리도 정부 돈 받아서 하고 싶은 거 한번 해보자는 의견이 더 많았다. 제안서를 작성하려고 주민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뭘 하면 좋을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 마을에 있었으면 하는 것을 조사해보니 의외로 구판장이 1위를 차지했다.

우리 마을은 면소재지에서 10km 거리에 있다. 택배회사는 우리 마을을 오지로 분리해서 택배배달을 해주지 않는다. 주로 어르신들이 사는 다른 마을은 일주일에 한번 배달을 가지만 우리 마을은 주민들이 차가 있으니 면소재지 택배점에 와서 찾아가라고 했고, 약간 불만은 있었지만 면소재지에 자주 나가는 터라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구판장 아이디어는 의외였다. 구판장 외에 운동시설과 마을도서관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주민의견을 모아 제안서를 냈다. 공모사업은 선정되지 못했다. 당선됐다면 대표인 나에게 큰 부담이 됐을 것이라 속으로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작년 7월, 마을협동조합 이사들이 구판장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공동생산하고 공동판매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협동조합의 운영취지를 살려서 판매장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구판장 시설은 기존에 있는 체험관의 창고를 개조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주민모임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체험관은 군에서 임대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개조하는 것은 군의 허락이 필요할 것이라 따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구판장 설립을 논의하는 모임을 협동조합 1인, 마을학교교사 1인, 마을대표단 2인 등으로 구성하고 3차례 논의를 했다. 구판장 건물은 중고컨테이너를 사서 만들까 하다가 비용을 계산해보니 작은 목조건물을 짓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인건비를 마을사람들이 협력해서 해결한다면 서로 협력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을에 사는 목수 2분이 기꺼이 마음을 내어 주축이 돼 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더 추워지기 전인 11월에 공사를 착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목수님들의 새로운 일정 때문에 일이 미뤄졌고 올 3월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목수 1분이 먼저 뼈대를 세우고 벽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일을 집중적으로 하는 열흘 동안 나는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페인트칠 등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마을에 있는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기간 동안 대표의 중요한 역할은 일손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민들이 시간 나는 대로 짬을 내 공사를 하다 보니 완공은 7월말에야 이뤄졌다.

그 사이 처음 제안을 했던 마을협동조합이 해체됐다. 주민들이 각자 하는 생업이 점점 바빠지면서 공동생산과 공동판매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협동조합 운영진들은 모두 사퇴를 했다. 결국 구판장 운영은 대표인 나에게 고스란히 맡겨졌다. 완공이 되어 갈수록 운영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커졌다. 애초의 취지는 친환경세제나 유기농제품 등 생활에 필요한데 면소재지 마트에는 없는 물품들을 떼어다 팔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합이 해체되고 주민들은 점점 바빠져서 마을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누가 물건을 떼어다 놓을 것이며 관리는 또 누가 할 것인가? 대부분의 시간을 무인가게로 운영하게 될 것인데, 무인가게의 특성상 적자가 날 가능성이 컸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에서 서로의 신뢰를 잃으면 아니 하는 만 못할 것 같았다. 걱정이 쌓여갔다.

고민하면서 생태마을에 대한 책을 찾아 읽다보니 전 세계 생태마을에는 대부분 재활용코너가 있다고 했다. 책을 쓴 저자도 그들 마을을 방문했다가 필요한 물건들을 재활용코너에서 무료로 얻었다고 했다. 이거다 싶었다. 안 쓰는 물건을 공짜로 내놓는다면 적자가 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홍성에 갈 일이 생겼다. 공동체 활동이 잘 되기로 유명한 곳이다. 홍동면에서 마을카페 겸 로컬푸드매장, 무인헌책방을 봤다. 게스트하우스와 주인장이 만든 작업공간도 봤다. 아름다운 공간들이었다. 고민을 안고 보니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도 우리 마을에서 이런 곳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에너지를 얻은 후 마을에 돌아와 주민들과 운영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아름다운 가게처럼 재활용가게로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어떤 주민은 먹고 남는 것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반찬을 만들었는데 혼자 먹기에 너무 많다면 덜어다 놓기도 하고, 하는 김에 조금 더 만들어서 내놓기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뜻밖의 아이디어에 힘을 더 얻었다. 마을밴드에 논의결과를 올리고 기부물품을 요청했다. 나도 집을 정리해서 내놓을 물건들을 챙겼다.

구판장의 이름도 공모를 하려 했는데, 사람들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자연스레 점빵이라고 불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라며 자연스레 점빵으로 정해졌다. 드디어 8월 말 아랫마을 주민까지 초대해서 개업식을 했다. 테이프커팅도 하고 마을잔치를 했다. 재능기부를 해주신 두 분의 목수님에게는 정성껏 보답의 선물을 드렸다.

점빵을 열면서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점빵에 내놓을 물건을 찾으려고 살림을 꺼내놓다 보니 집안 곳곳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다. 그 후 매일 매일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동안 머리 한쪽이 늘 무거웠는데 제때 정리하며 살다보니 한결 편안해지고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이 생겼다.

▲ 무인점포로 운영되는 점빵의 외상부(사진 왼쪽)와 점빵에서 가장 비싼 3000원 제품.

간소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의식하고 살지 못하니 주변은 순식간에 잡다한 물건들로 넘쳐났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즉흥적으로 사들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얻어 들이거나 선물 받은 물건들로 집안 곳곳이 그득했다. 버리기 아까워 쌓아놓았던 물건들을 내놓고, 혼자 먹기에는 많은 먹거리들을 작게 포장해서 내놓고, 유효기간이 도래한 것들도 내놓았다. 손수 만든 박하차와 꽃차도 내놓았다.

어떤 분은 직접 만든 비누를 내놓았고, 또 어떤 분은 텃밭의 고추가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다고 따가라고 하셨다. 집안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기념타월과 손수건, 옷과 양말과 스카프, 학용품과 장난감, 전자제품과 주방용품, 책 등으로 점빵은 그야말로 기적의 잡화상이 되었다. 무료로 해도 좋지만 그러면 과소비를 유발할 것 같아서 가격을 책정했다. 백 원, 이백 원, 오백 원, 천 원... 한 아름을 사도 만 원이 안 된다. 책은 대여형식으로 하기로 했다. 조만간 커피머신도 들여놓을 예정이다. 점빵은 도서관 겸 카페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점빵에 나가는 날은 매주 월요일 오후다. 인근 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쉬는 날이 월요일이라 같이 놀자고 그렇게 정했다. 첫날의 손님은 뜻밖에 마을 꼬마아가씨들이었다. 비가 오는데도 마을회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점빵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첫 손님이 반가워 음료와 과자를 대접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연신 묻는다. ‘에고, 이거 애들 놀이터 되겠구나’ 싶어 살짝 걱정이 됐다. 그 후에도 월요일에는 학교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점빵으로 직행한다. 휙 둘러보고는 “오늘 물건 많이 들어왔네요”하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어요”하길래 “그럼 외상으로 해” 했다가, “아니야. 외상은 안 하는 게 좋으니까 집에 가방 가져다두고 돈 가져오면 좋을 것 같아. 어때?”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얼른 집으로 뛰어가 지갑을 가지고 왔다. 아이들이 작은 지갑에서 꺼낸 동전을 받으니 기분이 오묘하지만, 내가 오래전에 하던 목걸이를 오백 원에 사서 걸고 나가는 모습이 재미있다.

한 주민은 행주와 연필을 사가고 호박 한 덩이를 놓고 가기도 했다. 마을의 유일한 대학생 아이는 스타킹을 사가면서 대박나라고 메모를 남겨놓았다. 집안에 그득하던 기념타월은 유정란 농장을 하는 아랫마을 주민이 한 아름 사가셨다. 인근 학교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구경 온 어떤 아이는 핸드백을 둘러매더니, “이거 어때요? 괜찮나요? 엄마에게 드리려구요”하며 사갔다. 한 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면서 이것저것 한 아름을 안고 갔다. 나중에 어떤 모임에 나가니 한 분이 내 목걸이를 하고 있다. ‘아, 저게 저렇게 예쁜 거였나?’ 싶다. 내게서 인정받지 못하던 물건들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활짝 피어난 모습을 보니 뭉클했다.

점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어언 이 년, 운영한지 이제 한 달. 무인가게인지라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르면 돈통에 돈이 들어있다. 신기했다. 그렇게 모은 한 달 수입을 정리해보니 오만 원 정도가 벌렸다. 이제 나의 꿈은 한 달에 이만 원 버는 것이다. 조만간 카페를 하던 주민에게서 중고 커피머신을 구입할 예정인데, 이만 원이면 점빵에 찾아오는 주민들에게 아메리카노 한잔 정도를 무료로 대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골마을은 어디나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있다. 오후쯤 아랫마을을 지나다보면 정자나무 아래에는 늘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다. 이제 겨우 10년 된 우리 마을에는 그런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정자가 없다. 우리 마을 점빵이 여름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이웃들과 냉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리는 느티나무 정자 같은 곳, 가을날 선선한 바람을 즐기며 파전에 막걸리 한잔의 즐거움을 누리는 마을주점 같은 곳, 추운 겨울날 오순도순 정담에 뜨거운 커피 한잔을 나누는 난롯가 같은 곳, 봄날 흩날리는 벚꽃을 즐기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멋진 테라스가 됐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

▲ 아이의 교육문제로 경남 산청에 내려오게 된 윤인숙씨는 이곳에서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현장인터뷰-“점빵은 공동체의 따스함이 머무는 공간”

도시 밖에서 도시를 연구하기 위해 시작한 시골살이
마을공동체와 함께 아이 키우며 행복도 채워가
필요치 않은 것 때문에 생긴 걱정, 나누면서 없어져

마을에서 크는 아이
도시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도시개발을 하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한 윤인숙씨는 시골살이의 풍요로움이나 공동체 생활을 꿈꿔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2013년 경남 산청의 간디마을에 아이를 입학시키게 되면서 전혀 예상도 못한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윤인숙씨가 이런 불편을 감수한 데는 아이의 교육문제가 가장 컸다.

“자기 표현이 서툴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 때문에 내면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시골을 찾다가 이곳 산청의 간디학교에 입학시켰어요. 전교생 70여 명 대부분이 마을 홈스테이나 기숙사에서 지내는데 늘 챙겨주던 부모가 없는 학교생활을 하며 자기 것은 스스로 챙기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더라구요. 저 또한 마을에 집을 짓고 본격적인 시골살이를 하면서 좋은 이웃들을 만나게 된 것도 좋았지만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추억을 쌓게 돼 엄마로서의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큰 좋았어요.”

간디학교에서는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 가르친다. 대안학교를 보낸 만큼 학교가 아이를 행복하고 자발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지만, 부모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하듯이 자식에게 부모의 욕망을 채우지 말고 부모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일하는 엄마가 그렇듯이 순간순간 삶이 버거웠다는 윤인숙씨는 엄마를 졸업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고,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산촌유학과 대안학교를 선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철이 들었다는 그처럼 아이들도 그간의 추억과 시간의 힘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촌에서
이곳에서 윤인숙씨는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삶, 즉 자족과 치유의 삶을 원했고 마을점빵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시골살이 초반에는 이런저런 걱정도 많았어요. 도시연구 하는 사람이 무슨 시골살이냐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걱정이 있었는데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시 밖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에 힘을 얻어 연구차원으로 살아보자는 게 처음의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윤인숙씨의 ‘오도이촌’, 즉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사는 삶이 시작됐다. 시골에서의 생태공동체를 만들어 생태적인 삶을 산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일들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편리해질수록 생태와는 멀어지기 때문이었다. 불편함을 상쇄하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 즐거움을 찾지 못해 다시 돌아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바꿔 행복해지는 길을 발견한 지금의 마을 주민들은 마음 수련자들이라고 윤인숙씨는 말했다. 자산이 변하지 않는 한 행복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까지 마을점빵이 큰 역할을 해냈다. 남들에게는 유용하지만 본인한테는 짐인 것들을 점빵에서 나누며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윤인숙씨. 그 과정에서 마음도 한결 편해지고 정서적으로 안정감도 찾았다는 그처럼 주민들도 점빵을 통해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도시에서처럼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걸 꾸역꾸역 부여잡으면서 걱정이 생기고 욕심이 넘친다는 윤인숙씨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