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주)바이네르 김원길대표

제화공에서 명품 구두제작사 대표 신화를 쓰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구두만들기에 매진하는 국내 컴포트 슈즈 1위업체인 바이네르를 일궈낸 김원길 대표를 만났다.
그는 돈을 버는데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번 돈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돕는 봉사로 만인의 찬사를 받고 있다.
김 대표는 드라마 같은 고난의 삶을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책으로 써내 꿈을 좇는 우리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굴곡진 삶의 흔적을 들어봤다.

열일곱 살 중졸 이후 영등포 진출해
구두제화공으로 취업

“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중학교만을 졸업하고 열일곱 살부터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김원길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충남 서산에서 양화점을 하던 작은 아버지의 제의로 구두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구두제작 전 공정을 5개월만에 익혔다. 빠른 솜씨를 눈여겨 본 선배가 김 대표에게 서울에 가서 기술을 배울 것을 제안했다. 김 대표는 이 말을 듣고 1978년 3월 열여덟 나이에 영등포 제화거리에 진출했다. 그는 여러 구두공방을 돌다 가까스로 일곱 번째 구둣가게에서 월급 없이 먹고 자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여름철 구두판매 비수기가 되면서 김 대표는 일자리를 잃고 강원도 설악동 산장에서 숙식보장 월 5만 원을 받는 일을 얻어냈다. 당시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부자여서 팁을 주곤 했다.

“여름 한 철 팁을 합해 55만 원을 모았어요. 경기도 성남으로 돌아와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인 방을 얻었죠. 그리고 서울 중곡동 소재 ‘찰스 제화’에 두 번째 취업해 구두일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 후 1년 쯤 지난 뒤 인생진로를 고민하다 돈과 명예를 얻으려면 착실히 사다리 오르듯 인생을 살아야 성공을 거둘 것이란 것을 깨우치게 된거죠.”

이에 김 대표는 인생사다리를 한 계단 한 계단 정성스레 오르기로 하고 구두제작에 매진한다. 어느 날 김 대표는 연탄가스 중독에도 불구하고 쉬지를 않고 1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1시간 걸려 출근하는 강한 근무 의욕을 보였다. 회사에 잘 보이려 한 게 아니라 매사 일을 우선하는 근무습관을 가지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구두공장을 월급제가 아니라 일한 만큼 돈을 주는 도급제로 김 대표는 남보다 많은 일을 해 제화의 달인이 됐다. 그리고 ‘찰스 제화’가 케리부룩에 납품을 하는 것을 기회로 친분을 튼 케리부룩 직원의 알선으로 케리부룩에 이직했다.

회사창업 성공 앞당기고자 월급 1/3주는 일도 맡아
당시 5대 제화업체인 케리부룩에서 일하게 된 그는 제화업계 경영인이 되고자 사장에게 생산관리부서 발령을 간청했다.
그가 처음 생산관리부서에 전근할 당시는 제화일로 받는 월급의 1/3수준인 30만 원 밖에 못 받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택했다. 구두산업 전반을 관찰해 성공한 경영인이 되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품질검사를 면밀히 한 탓에 100여 명의 제화공으로부터 집단항명을 받았다. 케리부룩 사장은 제화공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나 김 대표와 같은 책임감을 지닌 품질 감별직원은 찾기가 힘들다며 김 대표를 옹호해 계속 일을 시켰다.

면밀한 품질검사 구두명품화에 이은 영업담당
인천, 서울 관내 백화점 입점 대박 일궈내

그 뒤 김 대표는 영업관리 업무도 했는데 품질관리 만큼이나 꼼꼼히 했다. 케리부룩은 1989년 동인천에 있는 인천백화점에 매장을 열었다. 매장 얻는 기쁨도 잠시 3개월만에 월 1억 원 매출미달로 철수 통보를 받았다. 김 대표는 우선 인천시내에 배달되는 모든 신문에 케리부룩 광고전단을 넣어 돌렸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 ‘케리부룩 창사 30주년 인천백화점 입점기념 특별이벤트’ 현수막을 내걸었다.

첫날 매출은 이전보다 두배 많은 50만 원이 넘는 기록을 보였다. 그리곤 백화점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이용해 막무가내로 영업을 해나갔다. 그는 한달만에 1억1천만 원 매출 기록을 올렸다. 김 대표의 이 같은 성공이 소문이 나면서 콧대가 높은 서울 백화점에서 입점 제의 연락이 왔다.
“당시 백화점 출입 입구 매장에서 구두를 팔았어도 대성공해 케리부룩 창고가 텅 빌 정도였습니다.”
김 대표는 제화공, 품질감별관리와 영업사원으로 성공해 경영인으로 변신단계에 이르렀다. 케리부룩사장은 김 대표에게 구두완판 보너스로 해외여행 특전을 줬다. 귀국 후 케리부룩사장과 직원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알아보니 창고에서 나간 구두와 판 구두수가 다르다는 낭설이 돌았다.

동료직원 중상모략으로 퇴사 제화업체 창업
직원의 중상모략에 속은 사장의 냉대에 김 대표는 서슴없이 8년만에 퇴사했다. 김 대표는 케리부룩 퇴직금으로 구두부속품 공장을 차렸다. 그리고 1994년 안토니의 모태가 되는 자체브랜드로 제화업에도 뛰어들었다. 생소한 브랜드로 반응을 얻지 못해 4억 원 빚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숱한 좌절을 딛고 1994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린 구두박람회에 갔다. 이곳에서 바이네르 구두제조회사인 코바디사와 힘든 협상 끝에 세계적인 이태리 명품구두인 바이네르구두 3000족을 1억5천만 원이라는 적지않은 금액으로 사들인다. 그리고 왕년에 했던 영업전략으로 완판, 재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새 브랜드 반응 얻지 못해 이태리 바이네르구두
한국 제조 판권 얻은 후 끝내 인수 성공 위업 달성

그후 김 대표는 바이네르구두 한국판권을 얻은 뒤 바이네르구두 부족분을 한국에서 직접 생산해 바이네르 브랜드로 파는 협상에도 성공해 재기에 탄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태리 바이네르구두 제조사인 코바디사 쇠퇴로 김 대표는 바이네르를 전격 인수해 오늘의 바이네르사 한국 탄생의 빛나는 위업을 거둬냈다.

“바이네르 구두가 세계인이 모두 신는 명품구두로서의 브랜드 확산에 전력을 다할 겁니다. 저는 가장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한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멋지게 써야죠.”
김 대표 인생의 축복은 첫째는 여행, 둘째는 스포츠인데 이 둘을 직원과 함께 즐기겠다고 했다. 셋째는 요리인데 김 대표는 계절별로 고객을 초대해 그가 직접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즐기고 있다고 했다. 넷째는 노래인데 그가 직접 만든 노랫말인 ‘힘들어도 괜찮아’란 노래를 부르다보면 시련을 딛고 일어선 그 자신을 한번 더 응원하는 힘을 얻게 된다고 했다. 끝으로 사회봉사비용으로 국군 장병해외여행지원, 효도잔치, 농산물 구입, 고객사은품 등으로 1년에 10억 원을 쓰고 있는데 앞으로는 1년에 100억 원의 봉사를 위해 사세 진작에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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