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38)

나막신도 여인들의 귀고리나
목걸이에 앙증맞은 장식품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까…

장마가 시작됐다. 인명 피해가 나고, 집과 논밭이 물에 잠겼다는 보도도 잇따른다. 뒤질세라 장마를 대비한 레인코트나 우산, 레인부츠 같은 패션 상품들을 앞다퉈 선보이는 것도 이 무렵이다. 물론 어떤 것인들 장마가 주는 꿉꿉함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에게도 장마를 대비한 패션 아이템들이 있었다. 짚으로 엮되 실용성을 높여 어깨에 두른 도롱이도 그렇고, 갓 위에 덧 쓴 한지에 기름을 먹여 만든 갈모도 그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진땅에 신었던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도 있었다. 나막신은 비에 젖어 땅이 질퍽거릴 때 신는, 오늘날의 장화 대용품쯤 되는 것이었다. 물론 비올 때만 신은 것은 아니었다. 비단신을 신을 수 없거나 짚신 대신 신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유물 중에도 있다.

나무를 깎아 신발의 재료로 한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다. 일찍이 중국의 진(晋)나라(BC221∼BC206) 때 문공(文公)이 충신 개지추(介之推, 介子推)가 나무를 껴안고 불에 타 죽자, 애통하여 그 나무를 베어 신을 만들고 망인이 그리울 때마다 머리 숙여 그 신을 보았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서양에선 르네상스 시대에 ‘쇼핀느’라는 굽이 높은 나무 신발이 특히 관심을 끈다. 비올 때 신기도 했으나, 키가 큰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여인들이 땅에 끌리는 긴 스커트 밑에 이것을 신었다. 얼마나 높았던지 이 쇼핀느를 신고서는 누군가 부축을 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네덜란드의 특산품인 크롬펜(나무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무신이다. 바다보다 낮은 나라이니 진땅이 많았을테고, 그런 곳에서 나무신은 중요한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한 기념품 가게에서 유난히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을 한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신이라기보다는 예술품 같았다.

네덜란드에서는 옛날 총각이 처녀에게 구애를 할 때 자기가 만든 나무신을 선물로 가지고 갔다고 했다. 몇날 며칠이고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며 공들여 신발을 만들었을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곳에서도 그런 신을 신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온통 알록달록한 크고 작은 크롬펜으로 네덜란드가 가득 채워져 있는 듯하다. 공원 이곳저곳은 물론 건물 한쪽 벽이 온통 크롬펜으로 장식돼 있기도 하고, 각종 T셔츠에도 다양한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가 하면, 작은 열쇠고리에까지 대롱대롱 귀엽게 매달린 크롬펜들이 여행객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나무신이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나막신들은 1910년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차츰 퇴조하기 시작해 1940년대를 전후해 거의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산업화와 함께 1970~80년대엔 부산이 세계 최대 운동화 생산 도시로 이름을 떨치기도 한다. 물론 운동화 산업과는 다르지만 나막신도 오밀조밀한 정교함으로 여인들의 귀고리나 목걸이에 앙증맞은 장식품으로 매달려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장마철에 느껴보는 작은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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