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기획연재
금산에 살어리랏다■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 대상-김강자 씨의 ‘농촌은 무지갯빛 인생이다’
이희동 기자  |  lhd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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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5  09: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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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구전된 설화 속 주인공인 돌거북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큰 자랑거리다.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남 창원시 김강자 씨의 글을 싣는다.

배산임수의 길지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금산마을
주민들 배타감과 열악한 환경에 어려움도 많아
마을 대소사 챙기며 주민들과 정(情) 주고 받아

나이가 들면 자기가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자신도 모르게 되돌아보며 반성의 기회를 갖게 된다. 사람 사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만 그래도 좀 더 나은 삶을 구가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기도 한다.

도시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은연중 내 자신에 대한 창조적인 삶, 아니면 노후를 어디에서 보내며 열락을 누릴 수 있을지 막연히 그런 환경을 동경하게 된다. 여필종부라고 가족의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있던 남편이 평생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면 향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동반자로써 생각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나이답게 사는 모습이 정말 좋은데 과연 그것이 잘 실천되겠는지 자문해보면서 죽을 때까지 사람답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꿈이며 정년퇴직이 없는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날에는 사람의 수명도 환갑 넘기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의술이 발달하고 과학문명이 발달하다보니 특효의 치료약도 많이 개발되어 가히 백세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실정에 처해 있다 하겠다.

왜 노년의 얘기를 서두에 하느냐면, 일례로 화가 피카소 삶의 극히 일부분인데 우리들의 생에 있어서 의욕이라는 것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자포자기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겠다. 하지만 피카소는 칠십 팔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전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하며 생을 보낸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남편의 평생직장을 떠나게 되기 육칠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농촌의 전원을 그리며 모래성을 쌓듯이 수없이 설계하고 허물기도하면서 발품을 팔아 인근 50km 반경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지금 살고 있는 금산의 시골집을 소개 받게 되었다.

예부터 형성된 시골 마을인지라 조용하고 쾌적하여 마음에 들었지만, 매입하고자 하는 집의 규모가 너무 작았으며 출퇴근하여야하고 주차할 공간이 없을뿐더러 채소라도 심어먹을 텃밭도 없어 남편의 맘엔 반도 차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인 저로서는 도시 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형편을 고려해서 생각해보니 평소 꿈꾸어 왔던 것이 이루어지는 듯하여 마냥 맘에 들기도 하였다. 집을 사기전 몇 번 답사를 하여 주변 환경을 두루 점검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다.

멀리 잔동만의 바다가 산 능선사이로 한 뼘씩 보여 남편 근무시간에 전화하여 여기서 바다가 보인다고 알려주었더니 미쳤나 거기가 어딘데 바다가 보인단 말이냐 하면서 쏘아 붙였다. 남편도 뒷날 확인해보니 사실을 실감하고 교통의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나 나의 조름에 못 이겨 오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은 귀농, 귀촌의 구별 있는 생활모습이 아니다.

2006년 7월, 꿈에 그리던 시골로 시집오듯이 부푼 맘 담아 이사를 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얼굴의 농촌은 옛날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마디로 낯선 모습이었으며 정을 붙이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왜냐면 도시에 살던 사람이 시골에 오면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며 변화를 아주 싫어하는 관습 때문이었다.

안델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 내용 중 오리들 틈에 백조가 나타나니까 모든 오리들이 저건 바보다, 날갯짓이며 부리도 다르고 못생겼다며 쪼고 덤비니깐 백조는 자신감을 잃었지만, 홀로 호수에 떠 있는데 아이들이 몰려와, 아 저기 아름다운 백조를 보아라! 하니 그때서야 백조는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얘기처럼 내 스스로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백조라는 것을 인식시키기에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한국 사람들은 그래도 정에는 약한 편이어서 이웃 간에 소통하며 아픔을 나누려 애쓰고 담 너머로 음식이 오고갈 때 조금씩 맘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경로사상이 투철한 동방예의지국에서 무한동력을 발휘하여 이 마을을 마을답게 가꾸기 위해선 먼저 정신자세부터 서서히 변화시켜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농경문화에 오래 절어 살아온 이곳 주민들에겐 과거의 폐습에 물든 얼룩무늬를 지우고 확실성속에서 서로 유대하며 살기 좋은 두레마을 만들기에 솔선함으로써 새로운 각오 하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지금의 금산마을에는 역사와 전통이 서려있는 자연마을로서 서북산 아래 집 앞에는 다슬기며 피라미가 노니는 계곡물이 흐르고 새벽 세시면 묘법사의 도량석 목탁소리가 삼라만상을 제도하니 더 없이 평온한 마을이다. 좌우 중앙으로 연꽃 모양의 지형으로 마을 뒷산은 용의 형상인데, 그 용의 겨드랑이 위치에 옹기종기 집이 모여 있는 배산임수의 길지임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공존 할 수는 없는 탓인지 마을 주민들의 생각의 틀을 조금씩 바꾸기에 이르게 됨으로써 서로 터놓고 얘기하며 주고받는 정이 싹트게 되었다.

노인들을 자주 찾아뵙기도 하는 터에, 이사 오니 승용차 있는 사람이 우리뿐이어서 환자가 발생하면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기도하고, 들일하다 지나치는 분을 만나면 집 마당에 모셔와 음료수나 소주한잔 대접하기도 하고, 시골에는 옛날부터 미등기 된 상태로 지금껏 남아있는 집들이 있어 주인의 얘기를 듣고 등기를 부탁하면 손수 처리해 준 그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관심과 배려로 애정을 꽃피워 나갔다.

그러하니 자연 그 정으로 이웃집 토박이 아주머니들도 가을철 무며 채소들도 뽑아다가 집 앞에 놓아두고 가기도하고, 햅쌀이 나오면 찧어서 맛보라고 가져다주는 그런 정겨운 이웃이 되어 한결 좋아져 갔다. 그것이 숭늉 문화 속에 살아 온 우리들의 정이 아닐까 싶으니 더욱 이 마을 가꾸기에 헌신할 생각이 깊어졌다. 왜냐면, 내가 살고 뼈를 묻어야 할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터에 20년이나 비워둔 집은 추녀와 보가 빠져 허물어지고 쓰러지기 직전인 것을 남의 손 빌리지 않고 틈틈이 손수 남편과 실내외를 보수 개조하여 황토방과 차실을 만들어 손님이 오면 차실에서 차담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너무 좋았다. 마당엔 평소 좋아하던 백목련이며 매화나무, 철쭉, 석류나무 등을 심고 늘 푸른 차나무는 봄에는 찻잎을 주고 가을부턴 차 꽃이 피어 그 향이 선정에 들게 한다. 철따라 피는 초물의 꽃들도 심었다. 집 마당 입구엔 굽은 소나무를 심어 영객송이라 이름 지어 주인을 닮아 겸손히 서 있는 모습이 백세청풍에 주인을 대변할 것만 같다.

여기 이 마을에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마을 진입로가 좁아 경운기가 겨우 다니는 농로의 길이었다. 너무도 열악한 환경으로 여름이면 노인들이 시원한 그늘을 찾아 쉬는 곳이래야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였는데 모난 세석이 깔려있어 쉼터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마산시에서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차원에서 지원계획을 세웠는데 애쓴 보람으로 어렵게 금산마을에 배정을 받도록 함으로써 정자를 짓고 산모롱이가 무너지던 둘레에 옹벽을 치고 화단을 조성하여 평생 숙원이었던 일처리로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게 되었다.

마을 동구 밖에 세운 정자이름은 금산정(錦山亭)이라 명하고 현판을 남편이 서각하여 게시하였으며, 정자 내에 마을 전경과 주요행사 사진들을 게시함으로서 마을의 발자취가 남아 본보기가 되고 있다하겠다. 또한 어르신들의 앉는 자리가 협소하여 돌 탁자와 의자를 기증하였다. 도로 환경이 열악한 탓에 버스가 드나들게 하기 위하여 3년 전에 6미터 폭의 도로로 확대포장 개설토록 담당 실무 부서에 농촌마을 실정을 낱낱이 건의하여 완공을 하고 보니, 차량이나 농기계가 원활히 소통되고 가을이면 우케도 널고 너무나 편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촌에는 밤길이 어두워 불편한 탓에 보안등을 5개 신청하여 설치함으로써 안전한 보행 길이 되었으며, 산수도 즉 산에서 집수한 물을 식수로 이용하다보니 가문 여름이나 겨울에는 동파로 식수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인 탓에 지하수를 개발함으로써 지금은 물 걱정 없이 안심하게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운 사람 한분이 이렇게 마을을 변화시키고 삶에 의욕을 돋우어 주니 한층 젊어지는 삶을 사는 것 같다고 칭송이 자자함에 용기를 얻지만 도리어 미약함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성과 이름 석 자는 받았지만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에 어색함으로 자를 지어 이름대신 불러주고 택호를 지어서 무슨 댁이라고 불러주길 원한다. 그리고 호라는 것도 있어 상하 평교간에 호칭하게 되는데 여기 이사 와서 보니 소수이기는 하나 노인끼리도 이름을 부르고 하여 서로 예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 볼 때도 이건 아니다싶어, 날짜를 정하여 정자에 모이시도록 하여 어르신들의 성품에 맞춰 여덟 분에게 호를 작명한 후 호명서를 만들어 일일이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직접 본인에게 전달하였다. 그날은 서로 호를 호칭하며 자신의 호를 기억토록 서로 불러주기를 반복하였고 호 값을 한다고 이 날도 호 잔치를 하여 길이 남을 것이며 한 노인은 죽으면 비석에 새긴다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두고 있답니다.

그리고 시골에 와서 보니 구심점이 없었다. 무언가 친화력과 애향심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덜 채워진 듯한 느낌의 마을에 신경이 쓰였다. 그리하여 마을 이장과 터주 분들과 논의 끝에 시비를 세워, 주민들의 두렛일과 출향인의 애향심을 북돋우고 시에 담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2008년 8월14일 일죽 김병수 시인의 시 “금산에 살리라“를 주민들이 자력으로 세워 제막식까지 가졌다.

시비 기단에는 ”애금산여기(愛錦山如己)라 하여 ‘금산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는 지극할 정도의 애향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하겠다. ‘금산에 살리라’라는 시는 가곡발표도 하였으며 매년 시비 세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이날 동네잔치를 하고 있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산에 살리라

김 병 수

여명이 트는 서북산하에
산새 울음이 정을 돋우는데
살다 보면 아니 그리운 고향 있으랴

두렛일 벗 삼아
문전옥답 일궈낸 세월 덧없을까마는
무지갯빛 인생을 찬란히 피운 여기

한 마음 깊은 인연의 꿈을 엮어서
동구 밖 돌 거북이 날마다 지켜 갈
영원히 변치 않을 금산에 살리라.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금산리 대밭골 소재 詩碑전문(2008.8.14 건립)

또한 고래로부터 있어왔던 두렛일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고자 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명 호미 씻기, 써레 씻기 행사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봄부터 씨 뿌리며 김매는 밭일을 마쳤다는 뜻에서 호미를 씻고, 모내기를 마쳤다고 무논의 장비인 써레를 씻는다 하여 이를 두고, 우리 마을에선 다른 곳에서 보기 흔치않은 행사를 매년 백중 무렵이면 갖은 몇 분만이 목욕재계하고 제일 먼저 당산제를 지낸 후 정자나무에 막걸리 한 말을 붓고 나면 하루 종일 그간의 농사일에 대한 미담으로 찌든 피로를 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마을 화합의 길로 가는 아름다운 미풍이 아닌가 싶다.

우리 마을은 유서 깊은 곳이기에 전설이 서려있고 인심 좋고 아름다운 마을로 소문이 나있으나, 동구 밖에 있는 바위 돌도 예사로이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 온 터에 내가 돌의 형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와 흡사하여 거북바위라고 명명하고나서, 맞은편 베틀산을 배경으로 하여 구전되어 오던 얘기들을 정리하여 거북바위에 대한 전설을 만들었는데 거북바위 앞에 게시판을 만들어 놓았으며 많이 회자되어 읽히고 있다.

그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산 돌 거북의 유래

서북산 동남쪽 끝자락 대밭골 동구 밖에, 머리는 동향인 베틀산으로 돌아보고 몸통은 북향을 하고 있는 돌 거북의 형상이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북산 정기를 받아 지맥을 통하게 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지수화풍을 다스리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남해 용궁의 용왕이 후손을 얻고 싶은 마음이 극진하여 아들거북에게 배필을 찾아오도록 별유천지 인간 세상에 보냈단다. 산세가 마치 비단으로 둘러싸인 듯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에 가면 베를 짜는 절세미인을 만나게 될 것인데, 이 가인이 너의 배필이니 데려오라 하였단다.

마침 대 홍수가 일어나 사력을 다해 며칠을 찾던 중 금산이라는 마을에 그 여인이 있음을 알고 찾아 왔으나, 그 여인은 홍수를 피해 베틀산으로 피신하였음을 알게 되었단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물이 빠져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여인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한 채, 영영 바다로 되돌아 갈 수도 없게 되었단다. 그 후 베를 짜던 여인이 머문 곳엔 베틀을 놓을 만한 넓은 바위가 지금도 있으며 거북바위와 무언의 교감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나날이 떠나왔던 용궁을 못잊어 하며, 배필이 될 여인을 만나지 못한 애절한 마음으로 늘 고개는 베틀산을 향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돌 거북의 화신이 되어 요산요수인 금산마을 동구 밖의 수호신으로 남아 그 전설이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엮은이. 시인 일죽 김병수((사)세계문인협회경남지회장)

이렇게 유서 깊은 마을이 경상도읍지(1832년경)와 영남읍지(1871년경)에는 검암리였으나 1912년 명칭일람 발간 후 금산리로 새 명칭이 불러지게 되었다고 보아지며 그만큼 마을 이름조차도 비단 금에 뫼산인 금산錦山이라 칭하였으니 주민들 모두가 비단처럼 아름답게 살고자한 염원이 담겨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이 마을엔 춘추가 90넘은 분이 두 분 계시고 70, 80대가 주류의 연세 층이기에 마을의 앞날이 걱정스럽기 때문일까. 하지만 베틀산엔 어제의 해가 오늘 또다시 떠오르고 우리 마을 금산은 웃고 즐기는 속에 복지의 꽃을 영원히 피워 올릴 것을 기대하며 이 글을 접는다.

   
▲ 유서 깊은 금산에 정착한 김강자씨와 남편에게 이제 이 곳은 제2의 고향이다. 금산에 내려와 남편은 시를 짓고, 본인은 다도와 문인화를 그리며 전원생활에 만족해 하고 있다.

■현장인터뷰

애금산여기(愛錦山如己)…금산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문인화와 다도 몰두할 수 있는 전원생활 만족
시인인 남편 위해 주민들 자발적으로 시비 세워

감수성 넘치는 남편과 찰떡궁합
김강자 씨 부부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20년 넘게 비워둔 집이라 추녀와 보가 빠져 허물어지고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을 남의 손 하나 빌리지 않고 틈틈이 남편과 개조를 거듭해 황토방과 차실을 따로 만들어 손님이 오면 언제나 차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차실은 시인인 남편의 호인 일죽을 따 일죽헌이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마당에는 좋아하는 갖가지 꽃나무들를 심었고, 특히 늘 푸른 차나무는 가을에 꽃을 피워 그 향이 집 안팎을 감돌아요.”

김강자 씨가 손수 내온 녹차는 아홉 번 찌고 볶은 구증구포를 거치고 한 달간 숙성을 거쳐서 그런지 향긋하면서 구수한 맛과 향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에 처마 끝 풍경의 소리는 은은하게 귓전을 울리고, 마당 언저리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샛노란 달맞이꽃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왜 김강자 씨가 전원생활을 그리도 꿈꾸고 또 꿈꿔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남편 김병수 씨는 옛 마산시의 행정직 공무원으로 30년 넘게 재직해 왔지만 평생을 시와 함께하며 시 쓰기를 즐겨짓는 문인이다. 그래서 지금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경남지역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글쓰기 강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게다가 한 달에 2번 나오는 창원시보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아침이면 물안개 가득한 강둑에 앉아 농사일에 바쁜 주민들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는 문학소녀 김강자 씨와는 참으로 찰떡궁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부다.

김강자 씨가 또한 심취해 있는 것이 문인화와 도예였다. 차실을 만들 정도로 다도에 푹 빠져 만든 차 그릇이 수십 개는 족히 넘었다. 그림과 글을 함께 부채에 그리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어 출전한 지역과 전국대회의 상장도 수십 개가 넘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것에는 본인의 호도 꼭 써놓는다고. 집의 이로운 은혜라는 뜻의 ‘사리은’이 바로 그것이다. 아담한 차실에는 김강자 씨의 작품인 차그릇과 부채그림, 그리고 시인 남편의 시수와 서각에도 재주가 있는 작품들로 마치 작은 화랑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누구 부러울 것 없는 세상제일 부자
금산은 재미난 설화도 있다. 서북산의 정기를 받아 지맥을 통하게 하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돌거북. 그 옛날 용왕이 후손을 얻고자 인간세상으로 아들거북을 보냈는데 산세가 마치 비단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금산에서 배를 짜는 절세미인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하지만 큰 홍수로 지척의 여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용궁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게 바로 돌거북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설화와 배산임수의 절경 속에 살고 있는 김강자 씨는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도시의 아파트가 아무리 넓어도 마냥 답답할 뿐이었어요. 지금은 창문만 열어젖히면 보이는 게 모두 마치 다 내 것 같으니 이보다 더 큰 부자가 어디겠어요. 제가 공모에 낸 글 제목을 농촌은 무지갯빛 인생이라고 지은 것도 이곳에서 어렵고, 슬프고,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만족하고, 감사하고, 즐겁고, 함께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운 데는 부창부수인 남편의 공도 적지 않았다. 특히 마을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나서는 남편의 추진력은 참으로 금산을 많이도 바꿔놨다.

지금도 공사가 한창인 마을의 버스정류장도 남편의 역할이 컸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금산도 70분에 1번 다니는 버스가 어르신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근데 하루에 8번 정도 다니는 이 버스정류장이 마을과 거리가 멀어 요즘 같은 여름에는 거기까지 걸어가면 땀을 한바가지는 흘릴 정도였다.

그러던 것을 건의에 건의를 거듭한 끝에 마을 입구에 정류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지난 2008년 세워진 마을 초입의 ‘금산에 살리라’는 시비도 그간의 남편의 노고를 고마워하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것이라며 김강자 씨는 남편 칭찬이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의 정자나 버스정류장 같은 환경을 바꾸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남편은 본인의 재능을 살려 주민 8명에게 의미가 담긴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예로부터 부모도 함부로 자식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를 지어 부르곤 했었어요. 그런데 마을에 내려와 보니 주민들이 서로 이름을 막 부르는 모습이 예의에 어긋나 보여 날짜를 정해 그간의 부족한 품성을 다듬어 앞으로의 삶을 올바르게 살았으면 하는 뜻을 담아 호를 작명하고 호명서를 일일이 만들어 드렸어요. 그날부터 서로 호를 자연스레 부르고, 호 값을 한다고 호 잔치도 열어 주셨어요. 어떤 분은 비석에 이 호를 새긴다고 장롱 깊숙이 모셔 두고 있는 분도 계실 정도라 남편이 큰 보람을 느꼈어요.”

부부의 고향도 아닌 금산에 터를 잡아 원하는 전원생활을 시작했지만 여러 여건이 녹록지 않았었다. 하지만 진심을 담아 불편과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고 본인을 한없이 낮춰가며 행동한 결과, 이제 금산마을에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부부. 마치 금산마을 초입에 굽은 모습이 겸손하게 손님을 맞는 사람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영객송(迎客松)과 닮아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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