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49)

평균 기대수명이 남자 79.3세, 여자 85.4세, 육체노동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가동연한’이 60세가 아닌 아직도 팔팔한 65세로 법원판결이 난 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절반에 가까운 수(47.7%)가 빈곤상태인 노인 빈곤율 세계 1위 국가,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10만 명당 116.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인 나라, 그럼에도  아무런 준비 없는 ‘100세 시대’ 장수의 암울한 그림자가 사회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나라… ‘위대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 땅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이 땅의 노인 열 명 중 여덟, 아홉은 ‘부모는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전통적 인습에 기댄 고정관념은 헌신짝처럼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존속살인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거침없이 자행하는 무서운 자식들과, 60, 70나이에 황혼이혼도 불사하는 똑똑한 아내, 그리고 분노와 싸움 가득한 바깥세상, 그 잔인한 자본주의 세계구조를 힘들지만 떨쳐보겠다고 버둥대지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건 상실감과 패배감뿐이다.

그래도 새끼들이니까… 나 죽고 난 뒤 지들끼리 눈알 뒤집어가며 칼부림 날 일 없어야 하니까, 허리 전대 것 풀어 자식들에게 아파트며 돈 줄 생각을 아예 죽은 주인 찾아 집 나간 똥개 찾는 것 만큼만 쬐끔 가슴 한 구석에 남겨 둔다. 그래도 어미니까, 애비니까… 하면서.

하릴없이 지하철 무료 종점여행으로 뻔뻔하게 하루하루의 무료함을 달래는 지공거사(地空居士, 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 공원 해바라기는 되지 않겠다, ‘젊은 애들’ 손가락질 받는 ‘진상 꼰대’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의식과 욕구에 따라 복종하고 작동하는 오줌 누는 기능을 거세당하고 소변줄 차는 불행만은 없어야 한다며 아침 눈 뜨자마자 ‘밤새 안녕’을 확인 또 확인한다. 그리고 칠십이 되어서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아 텅 비워진 낡은 그릇에 알량한 늙은 지식을 샘물처럼 길어 담아보겠다는 꿈도 꾼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선시 구절도 마음에 담아본다. 많이 가졌다고 정신이 풍요로워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새끼들에게 다 물려주고 찌질하게 눈치 봐가며 그 자식들에게 용돈 타 쓰는 바보노인은 되지 않을 테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으로 완성된다면, 마지막 죽음을 맞닥뜨릴 때까지 지순하게 늙고 병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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