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풍요로운 유월이 출렁이며
넘치는 푸른생명 속에서
아담이 되고 하와가 된다

얼마 동안은 잦은 비 때문인지, 시야가 청정해서 미세먼지를 잊고 살았다. 먼 산은 마치 눈 덮인 설산처럼 그 윤곽만 살아있고, 강 건너 앞산도 쌀뜨물로 닦은 유리창으로 보듯 희뿌연 한 것 일색으로 테만 두르고 있다.

남편은 해뜨기 전 일찍 배봉지를 싸러 나가고 난 아침 찬거리를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현관에서 목이 따가운 것을 면해 보려고 마스크를 쓰고 소쿠리를 옆에 끼고 텃밭으로 향한다. 밭으로 가는 길가에 작년에 털어버린 들깨 찌꺼기 속에서 무수히 돋아난 깻잎이 제법 아기 손바닥만큼 자랐다. 큰잎으로 열 댓 장 딴다. 오늘 아침 첫 메뉴는 깻잎양념찜이다. 황토방을 돌면 상추밭이다. 적당히 잘 자란 겉잎부터 한 바구니 딴다. 두 번째 메뉴는 상추겉절이다.

그 곁에 씨로 흩어 뿌린 아욱이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촘촘히 난 아욱을 솎아서 멸치와 다시마, 말린표고로 국물을 내고 달게 익은 된장으로 아욱된장국이 세 번째 메뉴. 밭 울타리처럼 둘러 선 방아잎(배초향)도 실하다. 한 주먹 따서 미세먼지에 좋다는 미나리와 함께 장떡을 굽고, 그 곁에 섞여 자란 개똥쑥이 풍겨내는 스피아민트 향에 코를 박고 한참이나 머무른다.

마스크는 언제 벗겨졌는지도 모른 채 나는 생명을 숨 쉬고 있다. 아욱 옆으로, 차지한 땅보다 더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참나물. 잦은 비로 클로버처럼 한 줄기에 달린 세 잎이 각각 깻잎 한 장보다 크다. 갓 올라온 연둣빛 어린 순만 두어 주먹 꺾어 담는다. 살짝 데쳐 시금치 무치듯 흐리게 양념해도 자체가 향긋하니 맛있다.

밭을 돌아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취와 곤드레가 만발이다. 억세지 않은 잎으로 오늘 먹을 만큼만 딴다. 고기에 쌈장으로 싸서 먹어도 좋지만 경상도 출신인 나는 다양한 생선조림이나 젓갈을 얹어 쌈을 즐긴다. 어느새 가득 찬 바구니. 수돗가로 씻으러 가는 길 돌담 위 좁은 터에 심은 참외가 첨으로 별처럼 노란꽃을 피웠다.

아침날씨가 계속 10도를 밑돌아 참외, 오이, 호박, 고추가 잘 자라지를 못했는데, 이제사 오이도 덩굴손을 뻗어 엮어놓은 줄에 손가락을 감았다. 토마토를 묶은 지지대 주변에 뭔가 복잡하게 뭉쳐서 헝클어졌으면 필시 곁순이 자란 탓이다. 꽃을 달고 있는 원가지를 살펴서 그 겨드랑이에서 불쑥 자란, 때론 본 가지보다 더 큰 곁순을 떼어낸다. 토마토 향이 부서지듯 코끝을 찡하게 강타한다. 상큼 발랄한 것이 더 없이 시원해서 권태로운 일상을 한방에 몰아낸다.

단골처럼 수시로 나에겐 이렇게 맑은 햇빛, 향기 나는 바람이 놀며 넘나든다. 그래서 텃밭을 돌며 나물을 뜯는 것이 내겐 하나의 힐링이다. 살아있는 것들을 만지고 냄새 맡고 거기서 생명을 얻고 돌보는 것이 즐겁다. 풍요로운 유월이 층층이 출렁이며 넘치는 푸른 생명 속에서 나는 태초 창세기의 아담이 되고 하와가 된다.

수돗가에서 퍼올린 지하수의 차가운 물속에서 오늘 아침 먹거리가 풍덩풍덩 뛰어 놀다가 식초를 풀어놓은 물에서 샤워한다. 퍼질러 앉은 내 곁에 하얗게 센 민들레 꽃대궁. 더 마르고 말라 바람보다 가벼워지면 그 몸을 떠나 어디로든 날아오르겠지. 어디선가 남편 목소리가 들린다. “나 여기있어요~ 들어가요.” 서둘러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물 소쿠리를 받쳐 들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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