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35)

▲ 프랑스 파리에서 ‘바람의 옷’이라고 극찬받은 이영희 한복을 입은 모델(사진출처 : 이영희 한복 홈페이지)

이영희의 한복 인생은
혁신의 연속이었다.
전통을 깨며 전통을 살렸다

“동양의 샤넬이 되겠다”고 했다. “죽기 1시간 전까지 패션쇼를 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그 이영희 선생이 82세를 일기로 지난 17일 세상을 떴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업주부였다가 뒤늦게 한복 디자이너 길로 들어섰다. 40살 때였다. 친척 언니의 비단 이불을 만들어 팔아주고 남은 천으로 한복을 해 입었는데, 그 옷을 보고 주변에서 한복을 지어달라고 성화를 했다. 그 길로 오늘의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가 태어났다.

동양의 샤넬을 꿈꾸었던 그녀에게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달렸다. 1993년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쇼에 참가했다. 2000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한복 패션 공연, 2001년엔 평양에서 한복 패션 초청 공연을 했다. 2004년 뉴욕에 이영희 한복박물관을 개관했고, 2007년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한복 16벌을 영구 소장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2008년 구글 캠페인 ‘세계 60 아티스트’ 선정 등을 거치면서 그녀는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로 우뚝 섰다.

이영희의 한복 인생은 혁신의 연속이었다. 전통을 깨며 전통을 살렸다. 한복을 현대적 감성과 생활에 맞게 개발하고 변형시켜 다양화했다. 한복은 원색의 옷이란 고정관념을 깬 것도 그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패션 전문기자 로랑스 베나임은 그녀의 옷에 ‘바람의 옷’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바람의 옷은 다름 아닌 한복의 치마였다.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만 젖가슴을 싸매 입힌 것이었다. 갖가지 천연염색을 한 잠자리 날개 같은 노방의 치마가, 길게 터진 뒷트임에 따라, 모델들의 움직임이 바람의 흐름에 맞춰 무대 가득, 아니 전시장 가득 나풀거렸던 것이다. 세계 어떤 옷이 이런 묘한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지엄한 한복의 저고리를 벗긴 채 좌중 앞에 치마만 펄럭거리게 할 수 있을까. 그 모습이 세계인을 황홀하게 할 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동덕여대 교수로, 그와 안면을 트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집안 혼사에 그녀의 옷을 입은 적이 있다. 은회색 수직 실크를 골라놓고 그녀가 무엇인가 열심히 찾았다. 거기에 달 옷고름 재료였다. 이것저것 뒤적이다 꼭 맞는 색이 없으니 염색을 해야 한다 했다. 그리고 그 옷에 맞는 수(繡) 노리개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드디어 당일, 옷 일습이 왔다. 천연염색을 해 붙인 옷고름도 그렇지만, 더욱 놀란 것은 치마 말기에 꿰매 붙여온 보랏빛 나는 짙은 자주색 노리개였다. 행여 다른 노리개로 바꿔 색의 조화를 깨트릴까봐 일부러 꿰매놓은 것이었다. 얼마나 자기 작품의 색 조화를 중시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그녀의 작품은 빛이 났다. ‘색의 마술사’란 호칭이 붙을만했다. 그녀는 자기가 밝힌 바와 같이 옷이나 색에 대해 대단한 정규 전문교육을 받은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한복 디자이너의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언제나 용감히 뛰어들었다. 그녀는 평생 한복과 함께 하는 게 행복하다 했다. 그리고 어느새 대한민국의 보물이 됐다. 한복 디자이너로서보다 그녀의 삶이 더 큰 스승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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