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약속한 적이 없건만
변함없이 돋아나는
어린 풀싹을 보는 일은
내겐 신의 사랑이며 은총

매화 가지 끝이 붉어지고 꽃주머니가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 드디어 꽃잎이 터지기 시작했다. 집 뒤 담장 위로 개나리가 노랗게 타오르고, 빼곡히 들어찬 돌나물이 돌담 아래 길을 메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부추며 손가락 길이만큼 자란 돌미나리, 겨울을 참아 흙을 떠밀고 올라온 토종파는 어느새 여고생 종아리마냥 탱탱하다. 담벼락에 줄지어 세워놓은 참나무에는 하루가 다르게 표고버섯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뒷마당을 돌아 오르는 길엔 연두색 낮은 참나물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다. 아직 풀이 나지 않은 물가 기슭엔 애기 손바닥만 한 머위 잎이 초록별처럼 돋아있다.

처마 밑으로 새끼를 키우는 지, 참새 떼가 부산을 떨며 소란스럽게 날고, 잎이 나지도 않은 다래 덩굴 사이로 이름도 모르는 새들이 놀이터인양 몰려다니며 합창을 한다. 낮은음자리의 음표처럼 새벽에 가만히 빗소리 들리더니 언 땅에서 간신히 캐던 냉이는 이미 꽃대가 쭉 올라왔고, 어린 쑥들이 제법 퍼져 눈에 확실하게 들어온다. 우리 집은 괴산, 그것도 목도강을 끼고 산 중턱에 있어 산 아래 동네보다 봄이 늦다. 진해에 이미 벚꽃장이 개장했고 이젠 전국 어디서도 벚꽃이 피련마는 우리 집은 이제사 봄이 시작이다.

주말을 서울서 보내고 오니 뭔가 달라졌다. 거기엔 뭐가 나왔을까? 어떻게 됐을까? 내 궁금증은 장 뜨러 나왔던 주발을 손에 든 채, 슬리퍼를 신어 이슬에 젖은 발로 그새 달라진 봄을 보려고 집 안팎을 돌아다닌다. 엊그제만 해도 누렇게 말라 있던 들판에 누가 연둣빛 안개를 풀어 놓았을까? 강 언덕 위로 버드나무 연노란빛이 푸르러지고 풀빛 물이 들어 불어 난 강물이 느리게 흐르는,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바뀐 풍경에 마음이 움직여 싱숭생숭하다. 앞마당엔 알록 제비꽃리 망울지고 박하 순도 겹겹이 잎을 달아 모양새를 갖췄다. 솜털이 보송한 방아잎, 작약의 자주빛 어린 순은 한 뼘이나 솟았고, 수선화 잎줄기도 힘차다. 자두나무 가지에 초록의 자잘한 꽃망울들이 곧 터질듯하고, 배나무도 봉오리가 봉긋하게 부풀었다. 꽃이 모두 한 번에 필까봐 맘이 조마조마하다. 강 건너 푸른 솔을 배경으로 꽃향기 만발한 붉은 매화는 연지곤지 찍고 갓 시집 온 새색시처럼 화사하다.

주말에 농원을 벗어나 서울에 가서 사람들 틈에 섞여 살고 보면, 누구나 그렇듯 배려나 존중보다 자기중심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요즘은 지나치게 효율을 중시하며 추구하는 시대라 관계 속에서 상호간에 상처입기가 십상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적절한 거리를 갖는 것인데, 우리는 때론 그 거리감을 잊어버리고 지나쳐서 서로에게 흠집을 낸다.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에 혼자 상처를 헤집고 꼬리에 꼬릴 물어 상처가 마음을 닫아버리게도 한다. 이럴 땐 다른 일에 집중하고 몰두해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한 번도 약속한 적이 없건만 변함없이 돋아나는 어린 풀싹을 보는 일은 내겐 신(神)의 사랑이며 은총이다. 돌아온 생명을 만나는 것으로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고 상처를 어루만져 다시 삶의 희망이 부풀게 한다. 난 어제 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올 여름 간식엔 뭘 먹을까~ 작년보다 옥수수를 좀 더 심자. 다들 좋아하니까~ 대학찰옥수수 종자 봉지를 들고 천천히 밭으로 내려가는 남편의 등허리에 봄볕이 흥건하게 젖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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