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꽃샘추위에 봄은 더디지만
 동장군과 봄처녀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나보다

북서쪽으로 향한 우리 집은 아침 10시쯤에나 마당에 해가 든다. 산등성이를 메운 빽빽한 나무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화살로 날아와 눈이 부시도록 강렬하다.
햇살은 조금씩 두꺼워져 가도 아직은 바람 끝이 차고 매섭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 끝, 춘삼월에도 눈이 내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꽃샘추위에 봄은 더디게만 느껴지더니 조금씩 최저온도를 밀어 올리고 최고온도가 높아지면서 동장군과 봄처녀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나보다.
오랫동안 겨우살이 포로가 돼 면역력이 바닥이 났는지, 낮밤의 일교차를 견디지 못하고 콧물감기를 달고 산다.

작년에도 봄은 있었고 재작년에도 봄은 있었는데 올 봄은 아직 가보지 못 해서인가, 봄을 맞이하기가 영 서툴고 조심스럽다. 해가 바뀌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남편은 나무 손질을, 나는 장 담그는 일로 시작한다. 남편도 추위로 늦어진 일들(가지치기와 줍기, 나무 베기, 농원 정리 등등)로 정신없이 바쁘다.
나 역시 음력으로 정월(양력으로 2월)에 장을 담가왔었는데, 밤엔 땅이 얼고 낮엔 질퍽하게 땅이 녹는 날씨에 섣부르게 항아리를 만지다 깰 수도 있다싶어 올 해는 장 담그기도 3월로 늦췄다.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요즘은 가족과 몇몇 친척들과 나눠 먹을 만큼만 장을 담근다.

해마다 담그는 장이지만 염분 찌꺼기가 있고 해서 항아리를 맑은 물에 두어 번 씻어낸다. 구멍 낸 깡통에 숯, 짚, 솔가지를 넣고 불을 붙여 항아리 안에 넣고 뚜껑을 덮어 연기소독을 한다. 15~20분 소독이 끝나면 마른 행주로 항아리 안 구석구석을 닦아내야 한다.
오래된 항아리인데, 사이즈가 커서 머리부터 허리까지 몸통을 구부려 항아리에 넣고 컴컴한 항아리 안에 재를 닦다보면 처음엔 안보이다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그 속이 조금씩 보인다.
더듬어가며 밑면을 닦고 지름이 넓어지는 중앙을 지나 다시 좁아지는 입구로 닦아오는데, 가운데서 위로 올라오는 지점에 정교한 빗살무늬가 가로로, 세로로 층층이 그려져 있다. 그 무늬 사이에 끼었을 재를 닦기 위해 무늿결 모양대로 행주질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항아리 속에 누가 왜 이렇게 섬세한 무늬를 그려 넣었을까 힘이 들면서도 궁금해진다.

익살스런 도공이 재미 삼아 그린 걸까? 아님 항아리의 배가 나와 넓어지는 가운데 부분에 더 신경을 써서 닦으라는 뜻일까?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상상하며 항아리 속을 닦다보면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느낌이 든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누군가 밑줄 쳐놓은 글에 공감하며 읽으면 함께 읽는 것 같은 느낌처럼 말이다.
깨끗하게 씻어 말린 메주를 잘 닦은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넣고 3월장이라 염도를 19도에 맞춰 풀어 놓은 적정의 소금물을 붓고 고명으로 숯, 고추, 대추 몇 알을 띄우고 장 뚜껑을 덮으면 끝이 난다. 길었던 겨울 핑계로 늦은 장 담그기를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우리의 어설픈 봄이 시작되는가보다.

이제 머잖아 따스한 봄 입김이 닿으면 산이 풀리고 들판이 온통 몸살을 하겠지. 맘의 빗장이 열리고 설렘으로 들떠 오겠지.
세상이 어찌 요동치던 간에 봄은 기다리는 내 마음에 먼저 달려오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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