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하얀 눈이 포근포근 내린다.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하는
어제와 달리 마음이 편하다.

오늘은 올 들어서 눈이 제일 많이 왔다. 적어도 10㎝ 이상이다. 카드 속 그림 같은 설경도 잠시. 우리는 눈을 치울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집 앞 계단부터 쓸기 시작해서 마당으로 내려가면서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순서대로 눈을 치운다. 집이 산 중턱쯤에 있어 길에서 집으로 오르내리는 비탈길이 눈으로 얼어붙으면 꼼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린 날은 대빗자루를 사용하지 않고 둥근 반원 모양의 검은 밀대를 제설도구로 쓴다. 현관계단을 지나 한 줄로 마당을 밀고나면 순백의 눈 쌓인 비탈길을 남편과 함께 밀어낸다. 길 복판에서 밀대로 남편이 왼쪽으로 한 번, 내가 오른쪽으로 한 번씩 밀면서 길 가장자리의 배나무 아래로 눈을 밀어 쌓는다. 그렇게 하면 겨울 가뭄이 심한 요즘 같은 때에 나무에 눈이 녹으면서 수분 공급돼 아주 좋다.

나는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대 안으로 가득 차서 넘치는 눈덩이를 몰아 알뜰하게 나무 아래로 밀어 넣는다. 시작할 땐 털모자에 장갑에 장화로 완전무장을 했지만 벌써 온 몸이 땀범벅이다. 비탈을 다 쓸고 나면 집 안팎의 눈을 치운다. 창고로 가는 길, 집 뒤로 가는 길, 수돗가로 가는 길…. 다니고 싶은 곳만 밀대로 길을 낸다. 고양이인지, 고라니인지, 짐승의 발자국이 아무도 가지 않은 흰 눈 위로 연속무늬를 찍어냈다. 땅속 개미굴마냥 마당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겼다. 마치 우리 인생의 길처럼. 

오늘은 눈을 치우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땀범벅이 돼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시원하다 싶었는데, 어느새 한기가 들며 재채기가 난다. 콧물이 주르르 흐른다. 독감예방주사도 맞았고 겨울날씨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목이 따끔거린다. 며칠이 지나면 여행도 가야하는데 살짝 걱정이 된다.
장거리여행을 한 두 번 한건 아니지만 언제나 가방을 싸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인도 캘커타는 요즘이 가장 여행하기 좋아 평균온도가 19~20도라는데, 늦은 봄이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지만 이런 간절기에는 여기서도 입을 옷이 마땅찮다. 방바닥에 철 지난 여름옷을 태산같이 쌓아놓고 입을만한 것을 고른다. 넣고 빼기를 반복하면서 가방을 몇 번이나 뒤집는지 모른다. 나이만큼 늘어난 체중에 맵시 있게 입을 옷도 변변찮고, 낯선 곳에 대한 염려로 누룽지를 비롯한 밑반찬, 세면도구, 의약품들로 가방이 터질 것 같다. 여전히 자기염려로 가득 찬 내 보따리를 보면서 온전한 순례자가 되기는 아주 멀었다싶다.

한 겨울에 떠나는 여름여행지. 인천에서 방콕을 경유해 거기서 6시간을 기다려 16시간을 가야하는 곳이다. 떠날 날은 임박했는데 기침까지 심해지고 한낮에도 영하를 밑도는 추위에 기가 죽는다.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여행 목적지와 친근해져 보려고 인도를 검색해보고 가이드북도 챙겨본다.

그 땅을 밟기 위해 지도에서 위치를 찾고 책을 읽고 인도사람들의 얼굴을 자꾸 들여다보니 그가 누군가를 닮은 것도 같고 아는 사람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그 땅을 밟는다고 그들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세계를 향해 조금씩 건너가고 있지만 마침내 그 땅을 밟는다 해도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뿐이지 않을까?
미지의 인도 땅을 생각하면서 이미 여행은 시작됐을까? 이번 여정은 맘을 모두 비우고 맡겨야 할 것 같다. 더디고 느리게 사는 저들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 창밖에는 아침에 쓸어낸 길 위로 또 다시 하얀 눈이 포근포근 내리고 있다. 그런데도 길이 미끄러울까 걱정하는 어제와는 다르게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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