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한국산업개발연구원 백영훈 원장

우리는 지난 35년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가혹한 수탈을 당했다.
1945년에 해방을 맞았으나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그 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해 동족간 혈투를 벌이는 비극을 겪었다.
3년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국토는 피폐해지고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런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고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 할만한 국민성장을 달성하는데 앞장섰던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을 만났다.
백 원장으로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눈물겨운 비화(秘話)를 들어봤다.

 

기내식 돈 지불하는 것으로 오인
바나나 먹어 설사하며 독일 건너가

미국과의 교류중단으로 면담 거부
독일 은사 통해 독일-한국 간
교섭창구 얻어내

국비 독일 유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해
경제학 교수 자격 얻어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인도UN주재대사로  UN 한국 참전 16개국이 주축이 된 한국재건추진단(UNKRA)의 메논 대표로부터 한국재건 가능여부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고받았다.
“메논이 한 달 동안 한국을 샅샅이 살피며 조사한 보고서에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울 수가 있겠는가? 한국은 일어설 수가 없다. 자립 전까진 UN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비관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보고서를 읽고 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이 대통령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낸 서독의 개발 사례를 배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국비 지원 독일 유학생을 선발했다. 백 원장은 당시 고려대 상과대 졸업생으로 경제학계 석학인 최호진 교수로부터 독일 유학 시험을 보라는 지시를 받아 열심히 공부했다. 32명이 지원해 1명을 뽑는데 백 원장이 합격 했다.

이후 여의도 비행장에서 홍콩행 미국 노스웨스트사의 프로펠러 비행기를 탄다.
백 원장은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은 모두 돈을 지불하고 먹어야 된다고 잘못 알고 태국 비행기와 인도 비행기로 갈아타서도 기내식 대신 바나나를 사 먹고 설사가 나기도 했다.
인도 비행기로는 로마까지 갔다.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위해 독일의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탔다. 함께 탑승했던 영국 신사가 마카로니를 돈을 내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나서 기내식이 무료라는 것을 알고 처음 기내식을 먹었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백 원장은 쾰른 대학에 갈 기차표를 살 돈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고속도로에 나가 종이 에 ‘차 태워주세요’라는 글씨를 써서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을 얻어 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며 가난한 시절의 눈물나는 얘기를 요즘 젊은이들이 알아야 한다며 눈물을 훔쳤다.
백 원장은 이후 공부에 매진해‘한국의 공업화 과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써서 A급 점수를 받아 독일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A급 박사학위 취득은 교수 취업 자격을 얻는 것이다.

1963년 독일 차관 교섭 나선 박정희 대통령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한편,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집권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원수로 제대로 인정을 못 받았다.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권역의 군인들이 민선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사정권이 속출했다. 미국은 민주주의 맹주로 군벌국가 등장을 철저히 막았다. 이에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공법(Public Law) 480호로 원조 받던 잉여농산물 원조를 못 받았다. 심지어는 인천항에 도착한 원조물자의 하역인도를 거부해 되가져갔다.
1963년 박 대통령은 수행원 12명을 대동하고 미국에 갔다. 케네디 대통령은 앉으라는 얘기도 변변히 하지 않고 면담을 거부해 빈손으로 귀국했다. 이때 한국은행이 가지고 있던 돈은 2000만 달러에 불과해 공업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미국 지원은 끊기고 일본과는 국교가 없는데다가 좋은 사이가 아니라 다가가기 어려웠다. 이때 박 대통령은 독일이 같은 분단국가로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접촉을 시작한다. 이에 백 원장은 독일 경제학박사 1호로서 독일어 통역관으로 발탁된다. 정래혁 상공부장관에게 상공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 받으며 정 장관과 함께 독일로 간다.

미국정부와의 교류중단 여파로 면담 거부됐지만
독일 은사 통해 독일-한국 간 면담 성사시켜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을 만나려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군사정부와 교류하지 말라는 통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도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던 처지라 만나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백 원장은 대학 은사인 포크트(F. Voigt) 교수가 에르하르트 장관과 교분이 있음을 간파, 면담 주선 부탁을 했다. 은사 역시 군사정부라고 백 원장 만나기를 기피했다. 백 원장은 은사 댁을 찾아 부인께 눈물로 간청, 끈질긴 간청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의 면담이 성사됐다.

대학동기 주선 광부·간호사 파견
노임 은행담보조건 4천만 달러 들여와

이후에 독일 유명 기업과 우리의 나주 비료, 동양 시멘트, 한국 기계 등 교류 협력 조건으로 4000만 달러에 이르는 차관 획득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돈을 받아쓰려면 제3국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는데 은행 지급 보증을 받을 능력이 없었다. 이때 백 원장은 대학 동기인 슈미트 노동부 과장을 통해 독일에 부족한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 그 노임으로 은행 지급 보증 받자는 아이디어로 해결, 독일 자금 차관을 얻어냈다. 이후 독일기업들의 한국 진출에 이은 미국, 일본 등 각국이 경쟁적으로 한국에 진출, 한국 재건의 물꼬를 트게 된다.

한편 박 대통령은 진급한 에르하르트 수상의 초청을 받는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폭정을 폈던 히틀러는 독재자였지만 첫째 고속도로 건설, 둘째 국민차인 폭스바겐 생산, 셋째 철강·석유산업 육성, 넷째 농업혁명 추진 등 독일 발전 기반을 닦았다며 박 대통령에게 채택 수용을 권유했다. 한일 수교도 이때 권유했다. 그리곤 박 대통령을 세계적인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으로 안내했다. 이때 박 대통령 차를 정차시킨 뒤 길바닥에 키스를 했다. 수행원도 따라했다. 그리고 귀국 전날 백 원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독일 현지에서 장관급인 경제수석으로 구두 임명을 받았다.

백 원장으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포크트 교수는 경제수석 취임을 만류하고 박 대통령에게 백 원장을 학자로 키워달라는 친서까지 보낸다.
이 탓에 백 원장은 경제수석에 취임하지 않고 1965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개원해 경부고속도로, 소양댐 건설과 구미, 창원, 울산 공업단지조성 개발자문을 했다. 지금도 백 원장은 40여 명의 연구원과 함께 국가 발전의 새 비전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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