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황금빛 단풍을 사랑하고 
그 성숙을 배우며 마음속 갈피에 
차곡차곡 쌓아 깊이 넣어둔다.

 

이른 아침 거실 커튼을 젖히니 창에 이슬이 맺혀 주르륵 흘러내린다. 새벽엔 영하로 떨어졌나보다. 안개가 끼는 날이 이어지다가 이렇게 창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면 최저온도가 영하로 내려간다. 올 겨울은 다른 해보다 빠르고 추위도 심할 거라는 예고를 들어선지 된서리가 내리고 입동이 지나자마자 집집이 김장을 서두르고, 굳이 온도계를 보지 않아도 동장군이 곧 밀려들 것만 같다. 두툼한 누비잠바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서서 눈을 드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붉은 황금빛으로 물든 배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늘어진 가지마다 가을 햇살에 크고 넓은 황금빛 잎을 달고 바람에 살랑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어제도 느끼지 못했던 색감이 오늘 이렇게 한결같은 색으로 물들었을까! 매해 서리 올 때 쯤 단풍이 들곤 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단풍이 들지 않길래 서리 맞은 가로수 은행나무처럼 푸르죽죽하게 단풍이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떨어져버리나 했다. 며칠 전에 사진을 찍는 친구가 요때 쯤이면 단풍이 들 것이라고 찾아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간 일로 우린 심사가 더욱 심드렁해져 있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한방에 황금빛 나무들로 바뀌었는지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길을 나서면 추수를 끝낸 들판은 하나 둘 비워져 납작하고 평평해져서 하늘로 향한 공간이 더 넓고 많아졌다. 가끔 서리를 피하려고 배추밭은 파란 비닐 덮개를 죽 늘어 덮고, 갈대와 억새만 뿌옇게 부풀어서 바람에 휘둘리며 남편과 나 사이에서 입씨름을 부추긴다. 

차창을 지나치는 갈대와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새가 비슷하고 자라는 환경도 비슷해서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기 일쑤다. 도시에서만 자란 내가 헷갈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갈대는 여성에게 주로 비유돼 부드럽고 색이 희고 꽃은 부채꼴로 아담하고 가냘프며 무리지어 피고 많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반면 억새는 키가 크고 대가 굵고 색이 짙은 갈색이며 꽃이 부숭부숭하고 남성의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골 출신의 남편이 남성 느낌의 억새가 갈대이고 여성 느낌의 갈대의 이름이 억새라는 것이다. 사람의 편견이나 관습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 같다. 심지어 처음엔 남편이 틀렸다고 말할 땐 남편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는데도 나는 끝도 없이 헷갈려한다. 

왜 누군가가‘갈대의 순정’이라고 노랠 했을까? 억새의 순정이라고 고쳐야만 될 것 같은, 아직도 다 내려놓지 못한 것이 지금도 내속에 저항을 한다. 낱말 하나를 가지고도 남편과 몇 날을 씨름하며 자기의 생각 한 점을 고치지 못하는 나는 순리를 따라 변화하는 낙엽을 나의 스승으로 삼아야 되지 않을까. 

장에 갔다 돌아오면서 강 건너 편 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이 배나무 단풍으로 환하게 빛나는 걸 본다. 남편은 카메라를 쉼 없이 눌러 올해의 마지막 단풍을 채집한다. 배나무 잎은 그 잎이 넓고 커서 단풍이 들면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들여다보면 가운데는 황금빛 붉은 노랑에 잎 가장자리에 가늘게 초록 테를 두르고 있다. 아직 여름이 쬐끔 남아 있는 걸까 이제 곧 전부가 다 노랗게 변하겠지만 이렇듯 늦게 어렵게 물든 찬란한 단풍은 그대로 바람에 무너져 내려버린다. 그래서 하루 이틀 사이에 떨어진 단풍잎이 배밭을 황금빛으로 바꾼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몇 날 가지 못해서 곧 가지는 비어가고 바닥은 두껍게 황금 칠을 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단풍이 들고 떨어지고 했을텐데, 올 해 유난히 단풍잎 고운 색에 마음이 끌린다. 그것은 잎이 아니라 나무가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수 만 개의 아름다운 꽃이다.‘꽃보다 OO’라고 유행하는 문구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레알‘꽃보다 단풍’이라고 말하고 싶다. 줄 지어 서 있는 배나무 단풍도 아름답지만 잎 하나하나 가지에 달린 것을 보면 정녕 이것이 여름날 무성했던 초록 잎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난다. 머잖아 갈변하여 흙색으로 가라앉을 것이지만 나는 오늘 이 황금빛 단풍을 사랑하며 그 성숙을 배우며 마음속 갈피에 차곡차곡 쌓아 깊이 넣어둔다. 나무 잎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변화를 갈망하면서 다가오는 잿빛 겨울에 하나씩 꺼내볼 참이다. 배나무 가지 사이로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소리 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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