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24)

▲ 자색 염색의 원료인 ‘자초’

‘자색 갈증’은 19세기 중엽 
화학염료가 등장으로 해소됐다. 
‘귀하신 몸값’은 거기까지였다.

국내업체가 개발한 염료제조기술을 중국 업체로 빼돌린 사람들이 최근 경찰에 적발돼 입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인천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 붙잡힌 A씨와 B씨는 국내업체를 떠나면서, 7억여 원을 들여 개발한 염료기술을 빼내, 중국 업체에 취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빼돌린 제조기술로 모직이나 실크에 사용되는 화학염료를 생산해 2년 반 동안 26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염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에서는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필수품이다. 화학염료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은 식물이나 동물의 피, 흙 같은 것들을 이용해 색깔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대부분 나라들이 그러하듯 우리 선조들도 자기의 신분이나 계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색을 이용했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복색제도(服色制度)는 백제 고이왕 때(AD 260년)이다. 관리가 겉에 입는 옷의 색깔은 비색(緋色:붉은 색)으로, 평민은 입지 못하게 했고, 그 옷을 여미는 띠(帶)를 여섯 가지 색(자紫:보라색, 조皁:검은색, 적赤:붉은색, 청靑:파랑색, 황黃:노랑색, 백白:흰색)으로 직급을 구분했다. 자색 띠가 가장 높은 계급의 띠이고 백색이 낮은 계급의 것이었다. 이후 신라나 고려에서도 자색은 가장 높은 관리의 색이었다. 

자색은 고대 서양에서도 왕이나 귀족의 색이었다. 때문에 ‘로얄 퍼플(royal purple)’로 불리기도 했다. 자색은 색 자체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염료가 귀해서 매우 비쌌다. 그 원료를 지중해 연안에서 잡히는 조개(shell-fish)의 내장에서 채취했고, 12,000개의 조개에서 겨우 1.2g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조개를 해부해야 했다. 염색 과정에는 백반 같은 매염제를 넣어 막대기로 옷감을 잘 휘저어야 하는 고된 노동도 수반됐다. 희소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지중해에 면해 있는 티르는 고대 항구 도시로 오늘 날은 레바논에 속해있다. 바로 이곳에서 자색염료가 발명됐다 하고 실제로 그곳의 자색이 유명해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로 불렸다. 로마시대에는 염료 생산이 중요한 국가 비밀로 취급돼, 국영 염료 공장 밖에서 티리안 퍼플을 만드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값진 자색염료를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티르 사람들은 그 원료를 조개에서 얻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지초(芝草) 또는 자초(紫草)라 하는 식물에서 얻었다. 계림지(鷄林志)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자초 염색이 발달해 이 식물을 찧어 만든 염료로 염색하면 색이 ‘기묘’했다고 기록돼있다. 세종실록에는, 위로는 고관대작에서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자색 의복을 좋아해, 천 한 필(匹)을 염색하는데 천 한 필 값이 든다며, 궁궐에서만 사용하도록 자색을 철저히 금했다고 했다. 자초 염료는 여전히 고가였고, 일반 대중의 접근을 차단한 채 상류 계층에서만 독점했다. 그러다 보니 자색 염색술의 발전이 저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서양모두 특수 계층의 독점으로 빚어진 그 ‘자색 갈증’은 19세기 중엽 화학염료가 등장하면서 해소됐다. 자연히 자색의 ‘귀하신 몸값’은 거기까지였다. 모든 색의 귀천이 일시에 없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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