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겨울이 가까워지면 
생명의 기적을 깨닫기에
삶에 대한 의미가 값지고 
더욱 소중해진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는다. 오늘은 어디까지 떨어졌을까? 서리가 내리려나? 아직 밭에 무 이파리가 시퍼렇게 청청하고 호박도 몇 개 달린 채론데, 호랑이콩도 줄기에 줄줄이 붙어 있는데~. 그래도 상강이 지났으니 최저 5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약한 서리가 올 때이긴 하다. 10월을 들어서면서 최저온도가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고 원만하게 하향곡선을 그려서 아직은 안전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오늘 아침은 초겨울이 감지되는 톡톡 쏘는 공기가 맵다. 계절의 순환 중에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변화가 내겐 가장 큰 자극이고, 구체적이며 현실감 있게 만든다. 먼저는 겨울을 막아 보려는 마음에서 조급해지고, 다음은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준비를 서두른다. 아직 푸르게 살아 있는 것들이 느닷없이 떨어지는, 지구의 체온에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는 일은 반드시 마음에 후회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상향곡선을 탈 때와는 달리 겨울로 향해 가는 내리막에는 우리의 맘을 헤집는 오랜 이별의 근심과 아픔, 두려움과 깊은 외로움이 스며온다.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한계에 이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생명이 있다는 것이 기적을 거머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에 살아 있는 삶에 대한 의미가 값지고 더욱 소중해진다. 

만물이 다 그러하듯이 인생도 이에서 다를 바가 있으랴! 우리의 육신이 강물이 흘러가듯 끊임없이 노쇠와 죽음을 향해 나가고 있음에도 자신의 일로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가을에서 겨울로 향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해 본다. 생명을 다한 육체가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 객관적으로 보면 어려울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온다면 어떨까? 그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몇 달 전에 인간의 죽음에 관한 책으로 전 세계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의사‘셔윈 B. 눌랜드’의‘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읽었다. 죽음을 정면으로 한 번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오늘의 눈부신 의학이 결코 인간의 노화를 중단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며, 죽음을 받아들인 노인의 희망은 자기에게 주어진 유한 한 시간 안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아르스 모리엔디’(죽는 방법), 즉 병원이 아닌 자택에서 사랑하는 사람에 둘러싸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축복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점점 삶의 기능을 잃어가고 사그러지는 과정이지만 그대로 상세한 과정을 알게 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죽음을 준비하게 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에서 격리돼야 하는 흉하고 더러운 것이 아니며 패배나 굴복 또한 아니었다. 죽음이 있는 정해진 삶이기에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죽음, 존귀한 죽음은 그가 살아생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에‘매일을 내 생에 마지막 날로 여기며 살라’고 했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말이 지금 이 시간 여기에 강한 에너지를 쏟아붓게 한다. 잘 살아야지! 아름답게 살아야지! 열심히 사랑하며 의미 있게 살아야지! 

나는 내년 1월에 인도 단기선교에 자원했다. 가장 고령에 속하는 내가 지원한 것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도움닫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이란 말에는 오히려 뜨거움이 숨어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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