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새소리 따라 넋 놓고 쳐다보는
푸른 하늘에 흰 양털구름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나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아침 일찍 충주에 있는 병원에 다녀오려고 차를 몰아 집을 나섰다. 어제 밤에 잠시 내린 비 때문인지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하고 투명하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면 생각은 어느새 일상을 몰아내고 떠도는 방랑자처럼 느리고 더딘 여행자 모드로 전환된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은 논둑에 한줄 푸른 콩밭으로 가로 세로 칸을 지른다. 초록으로 겹겹이 들어찬 산언덕 아래 망초가 안개처럼 깔려있는 사이사이에 달맞이꽃이 아직 노랗게 서있고, 군데군데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하늘거린다. 아직은 아무것도 떠나지 않은 풍경이 맘을 놓이게 한다.

들판위로 릴케의 가을바람이 분다.‘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올해는 추석을 한 달 앞두고 과수원에서 배를 땄다. 날씨 탓인지 예년보다 일주일 정도 빨라진 셈이다. 친구 친척들이 배 안부를 묻었다. 단맛은 들었는지? 무슨 배인지? 추석 전에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이 과수원을 사서 귀농했을 때 수분수로 조생종인 원황, 화산, 황금, 감천 등이 10~20주씩 심겨져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주종인 신고 배였다. 해마다 추석의 날짜에 따라 어떤 배가 출하될 지가 결정된다. 올해는 추석이 10월 초였지만 연휴가 길어져서 9월 말까지 배를 보내려면 만생종인 신고 배는 어렵고 가장 먼저 따는 원황, 화산, 황금배로 필요를 채워나가야 했다. 이럴 때면 남편은 9월 중순에 무슨 배를 딸 수 있겠냐고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러면 나는 매번 릴케의 가을날 한 줄의 시가 나의 기도문이 된다.‘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익어가는 열매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해 주소서.’ 

릴케의 기도만큼이나 하나님은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2주간의 뜨거운 한낮의 햇살을 받아 배나무 주변을 지나가기만해도 달콤한 배향이 풍겨 나오도록 배는 잘 익어갔다. 서둘러 배를 땄다. 늘어진 가지에 달린 무거운 배를 하나씩 따내면 가지는 순간 위로 튕겨 오른다. 배 무게를 덜어낸 나무는 푸른 하늘로 머리를 들고 신나게 휘파람을 분다. 우린 한 해 동안 기도해주고 함께한 형제 친구 이웃들에게 한 박스의 배로 감사를 보냈다. 한 해 한 번도 제대로 소식을 나누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저 배 한 박스로 안부를 묻고 또 우리의 건재함을 알려드린 것이다. 배를 받고나면 받은 이가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데, 전화 목소리 듣는 것은 반갑고 더욱 기쁜 일이 된다. 추석 전까지 주문 받은 배를 보내느라 힘들고 몸은 고됐지만 가을 햇빛 속을 거닐며 향기로운 배향에 젖어 사는 일은 내게 또 하나의 휴식 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허리 통증을 치료 받고 돌아온 날은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게 해서 종일 쉬어야 했다. 마당을 서성이며 며칠 동안 가보지 못한 집 뒤안길로 향한다. 그새 별같이 작고 흰 정갈한 취꽃이 무리지어 피고, 남보라빛 짙은 방아꽃, 작은 엉겅퀴 같은 모양의 자주 빛 곤드레꽃 등 아직은 이름 모를 풀꽃이 각양각색으로 피어 있다. 작은 꽃에 매달린 엉덩이가 커다란 호박벌이며 호랑나비, 검은 날개가 큰 제비꼬리나비가 체구에 맞지 않게 작은 꽃을 오가며 분주하다. 가을 오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마른 풀대에 앉아있다. 미동도 없는 푸르고 쾌청한 한낮의 고요를 깨고 새가 날아오른다. 새소리만 남은 텅 빈 공간도 그림이 되고 서늘한 아름다움이 된다. 마음에 맴도는 한 줄의 편지를 쓰자마자 날아와 먹어치우는 콩새들, 새소리 따라 넋 놓고 쳐다보는 푸른 하늘에 흰 양털구름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나는 유치환 선생처럼 결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나를 둘러싼 뭇 생명으로 사랑을 고백해본다. 흐린 연필로 쓰는 가을 편지가 돼 낙엽처럼 바람에 실려 여기 저기 굴러다닌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