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우리 동네 칠공주 
어르신과의 만남이 즐겁다

장마가 지났는데도 이렇게 비가 지루하게 자주 내리면 농촌마을에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비 오는 핑계로 모처럼 마을 어르신 얼굴이라도 봬야겠다 싶어, 내일 별일 없으시면 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이나 드시자고 연락을 드렸다. 삼계탕을 끓이겠다고 하니 벌써 어르신들은 나를 먼저 걱정하신다. 병원도 가야한다면서 왜 돈을 쓰냐며 그만 두라신다. “메뉴가 맘에 안 드시냐?”고 여쭈니 대번에 엄나무가지나 오가피탕에 들어갈 약재는 거기서 준비하신단다. 나는 그저 닭 댓 마리에 이름만 내면 끝이다. 

우리 동네엔 남자 어르신 두 분에 여자 어르신 일곱 분이 전부다. 모두 고령이시다보니 몸을 움직일만 하신 분들은 농사를 좀 지으시고 다들 텃밭 정도 가꾸시며 소일하신다. 마을회관 밖으론 굵은 비가 쏟아지는데, 오늘따라 다함께 모여 오랜만에 더 없이 화기애애하다.

몇 가지 밑반찬에 삼계탕 한 그릇씩 맛있게 드신다. 설거지에 상을 치우느라 부산하니 남자 어르신은 슬며시 먼저 퇴장을 하신다. 제일 고참인 김진애 할머니가 병자어머이(그중 막내)에게 커피를 타오라 시키신다. 나 역시 집에 가도 별일 없는 터라 어르신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게 된다. 

처음엔 어르신들과의 공통된 화제를 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내내 듣기만 했고, 그마저도 못 알아듣는 내용이 많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당신 세대와 다른 우리세대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점심에 함께 오지 않은 남편 흉부터 본다. 

“어째 애기아빠는 안 왔어? 이럴 때 같이 와서 먹으면 좋잖아. 갈 때 한 그릇 가져가. 따로 떠놨어~” 어르신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남자가 운전도 못하고 30년 가까이 제가 태우고 다니잖아요. 누가 찾아와도 나보고 나가보라고 등을 떠밀거든요. 충청도 양반이라선지 말이 없어요. 
“그런데 장가는 어찌 갔누?” 모두 와하고 웃으신다. “그래도 회관 어르신께 간다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줘요. 부모님 생각이 나나봐요.”“왜 부모님이 어찌 됐는데?” 

나는 시댁 얘기를 풀어놓는다. 남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3.1운동 때 동네사람들을 규합해서 충북 영동에 있는 학산주재소를 불태우고 만세 운동을 벌였고, 이 일로 일본군에게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러자 남편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머니를 대신 잡아가 고문을 했고 심지어 총개머리로 때려 두 눈이 빠지셨다고 한다. 도망을 다니던 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자수를 해서 3년 언도를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할아버지는 객지로 돌다 돌아가셨다. 어머니 고문소식에 바로 자수했던 아버님은 남편이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막내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아들을 한 번 더 보려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눈을 못 감았다고 했다. 열중해서 들으시던 어르신 눈에 눈물이 촉촉하다. 
“우리 땐 다 그랬어~” 

우리 이야기는 서서히 부모와 자식 얘기로 번져갔다. “이번 내 생일에 큰아들네 집에 갔는데, 아들 딸 손주 모두 편지를 써서 돌아가며 읽어주는데 눈물이 나대.” “나는 큰아들이 청주에서 김밥장사를 하잖아. 가네들 채소를 좀 대주려고 파를 심었어. 고추니 배추니 해줘야혀.” 
양대춘 어르신이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복숭아며 고추며 한 바구니 가져왔다. 남편 갖다 주라며. 이야기에 취해 있는데 집에 누가 찾아왔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히 일어났다.  

아쉬운 헤어짐으로 빗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우리 동네 칠공주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머잖아 흙으로 돌아 갈 것을 알기에 더 애틋하고 진실하다. 남은 이 길을 함께 걷는 길벗이 되니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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