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운 토양학 박사 객원 칼럼니스트

생명 없는 흙 살린다고
‘친환경’이란 상상이 
살충제 달걀 파동 불러

농촌여성신문 창간 즈음, 한동안 고정칼럼을 연재했었다. 이제 나이도 들고 해서 쉬고 있는 중인데, 작금의‘친환경농업’이란 말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해서 한마디 거든다.
나는 세칭(世稱) 토양학자다. 그러나 나는 토양을 알기 위해 토양을 공부한 적이 없다. 흙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식물의 복지(福祉: Welfare)를 염두에 두고 흙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흙에 대해 공부해왔을 뿐이다. 흙은 왜 흙인가? 흙은 죽을 수도 있는 것인가?
흙을 생각할 때마다‘석상난생초(石上難生草)’라는 일화가 생각난다. 이 말은 바위에는 풀이 날 수 없다는 뜻이다. 산에 있는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바위틈의 흙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왜 바위에서는 식물이 자랄 수 없고 흙에서만 식물이 자랄까? 그것은 물질의 비표면적(比表面積: 일정한 무게의 물질이 갖는 면적: 대개는 1그램의 물체가 갖는 면적. ㎡/g으로 표기)의 문제다. 보통 흙(양토) 1그램의 면적은  10㎡ 정도다. 매우 넓은 면적이다. 면적이 크면 그 표면에 묻을 수 있는 물의 양도 많다. 바위는 비가 와도 금방 마르지만(그래서 바위에는 늘 비가 오지 않는 한 식물이 자랄 수 없다) 흙에는 비가 가끔씩만 내려도 식물이 자랄 수 있다. 
흙이란 무엇인가? 바위의 크고 작은 파쇄물들이다. 그중에는 이른바 나노(Nano) 크기에 속하는 것도 많은데, 그게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흙 자체에는 생명은 없다. 생명 없는 바위의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흙 자체는 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친환경농업을 한다는 이들이 말할 때마다‘흙을 살린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살아 있지도 않은 흙을 어찌 살리겠는가? 
흙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은 흙에 생물들이 살 수 있게 하는 물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은 많은 생물들이 경합하는 환경이 됐다. 그런 환경은 사람이 농사를 짓기 어렵게 하는 환경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농사를 풍성하게 짓자면 작물의 뿌리에서 작물이 이용해야 할 거름을 가로채는 잡초도 문제고, 심지어 작물에게 해를 가하는 해충, 세균, 곰팡이 등 만연할 위험을 가진 게 흙이다. 그것이 작물을 둘러싸고 있는 흙이라는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서 환경 친화적인 농법은 어떤 것일까? 작물에게 위해를 가하는 요인들로부터 작물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것보다 더 낳은 방법이 있을까?
최근의 살충제 달걀 파동도 구체적이지 못한‘친환경’이란 상상에 의존한 결과로 불거졌다. 농약 묻은 달걀이 이른바 친환경농업 인증을 받고 닭을 키운 농장에서 더 문제가 됐다하니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런 친환경농업 인증을 내주고 대가를 받은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세칭 마피아들일까? 기본을 알자. 막연한 상상에 의존하지 말자. 
오늘날 소위 강대국들의 창고는 식재료로 넘쳐난다. 하지만 농사를 제대로 못 짓는 지역의 엄마들은 젖이 안 나오는 젖꼭지를 아기에게 물린 채,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안 먹고 그냥 잔다. 이러한 가난한 나라들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게 구체적으로 돕는 길은 뭘까? 망언다사(妄言多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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