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손에 움켜쥐었던 
단단한 것들을 내려놓고 
따스한 것들로 채우고 싶다

집 앞을 흐르는 목도강은 유속이 완만해서 특별한 기상이변이 없는 때는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실 큰 창으로 내다보면 무성한 여름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강물은 호수 같기도 하고 그저 멈춰서 가만히 고여 있는 듯하다. 유난한 무더위로 집밖을 나가기도 힘들고 어려운 터라 엊그제는 딸이 마련한 건강검진 티켓으로 서울에 있는 메디컬센터에서 자세한 검진을 받게 됐다. 15층에 위치한 건강검진센터에서 내려다보니 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 수색역사와 기지창, 상암동 신시가지 등 그 일대가 환하게 다 보였다. 수색은 20대 때 처음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경남 진해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해서 수색에 살던 삼촌댁에서 통학을 했었기 때문이다. 

거의 40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 옛날의 동네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그곳엔 없었다. 높이 치솟은 아파트며 빌딩들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도로들, 그 옛날 버스를 타고 다니던 구불구불한 길과 다닥다닥 붙은 낮은 집, 버스 안내양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사람들을 밀어넣고 차체를‘탕탕’두들기며‘오라이’를 연발하던 풍경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수색역 뒤로 기지창 선로에 겹겹이 늘어선 알록달록한 장난감같은 작은 기차들을 바라보니 뽀얀 먼지 속에 쌓여 있던 옛일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대학 1학년 첫 학기, 시골에서 상경한 나는 삼촌 집에서 학교 가는 길만 겨우 아는 촌뜨기였다. 학교까지 통학거리는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서울 외곽의 수색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서 출퇴근 시간과 등하교 시간이 겹치는 아침 시간은 지옥버스였다. 나는 그날도 수업 교재와 노트를 넣은 바인더를 가슴에 안고 버스를 탔다.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 서 있었다. 응암을 지나 녹번이었다. 버스 안쪽에 탄 사람들을 우선 내려주기 위해 입구에 선 사람들이 일단 내렸다가 다시 타야했다. 그런데 내리는 이는 둘이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태우다보니 나는 버스 입구에 겨우 발을 올렸었다. 차장이 나를 배로 밀고‘오라이’를 외쳤고, 버스가 출발할 때 출렁하면서 나는 차장의 팔 밑으로 미끄러져 버스에서 떨어졌다. 나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혈관주사를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로부터 가슴까지 답답하면서 꽉 막혀오는 것이 앞이 깜깜해졌다. 순간 낯선 서울, 나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죽나 싶었다.‘아! 하나님~~~’.“학생 학생~”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죽지는 않았다. 간호사의 말이 주사약에 부작용이 있어서 해독주사를 맞고 이제 깨어난 것이란다.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콩나물시루 같은 수색버스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큰 규모의 검진센터답게 안내자는 친절하고 세련됐다. 검사 받는 이를 인식하는 전자팔찌였는데, 검진방 입구에 대면 바로 인지가 돼 방마다 기다림 없이 진행돼 두시간만에 검사를 마치는 듯했다. 근데 마지막 복부 CT촬영에 문제가 생겼다. 기계가 고장이 나서 오늘 못한다는 것이다. 괴산에서 서울, 게다가 상암까지 다시 오긴 쉽지 않지만 할 수없이 다시 날을 잡았다. 서울을 빠져 내려오면서 왠지 떨떠름했다. 번화하고 세련된 수색보다 지옥버스 그 옛날의 동네가 더 정답고 그리워진다. 요즘 병원 찾는 일이 잦아지면서 삶의 가치의 앞뒤가 점차 바뀌고 더 헐렁해진다. 손에 움켜쥐었던 단단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대신 평안하고 따스한 것들로 채우고 싶다. 그 옛날의 추억 하나가 내 맘의 작은 불꽃을 붙여 어느새 온 세상이 따뜻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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