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박옥임 순천대학교 사회복지학부 명예교수

잊혀 돌아오지 못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과 
기록을 밝히는데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를 위한 
힘찬 걸음을 우리 스스로 
걸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는 8월15일은 잃었던 국권을 되찾은 광복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근 한수산 작가의 소설‘군함도’가 영화로 제작돼 스크린 수와 상영점유율에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탐욕적이고 잔인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그라지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공분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진솔한 성찰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이 더욱 발전해 세계의 으뜸국가로 우뚝 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가 아직 많다. 그 하나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공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사표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국격이 신장되고 국민들이 풍요를 누리는 것도 모두 독립운동가의 희생 덕택이다.

그런데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여성독립운동가를 헤아려보면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관순 열사 외 의병대장 윤희순, 날아다니는 여자장군 남자현, 의열단원 박차정, 독립군자금책인 이은숙, 광복군 지복영 등 몇 명만 거명해도 알려지지 않아 이름도 생소하다. 이유는 아직도 한국사회가 여성들의 활동이나 치적에 대해서는 관심이 극히 미미할 뿐더러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겸손한 태도와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훗날 후손들이 생계마저도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 후손도 없이 생을 마치거나 가명이나 이칭 등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기에 입증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 특별전시에‘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266명’이 서대문역사관에서 전시됐던 점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먼저 소개하는 강주룡(1901-1932) 열사는 남편과 함께 서간도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면서 25살부터 평원고무공장의 여성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준 노동운동가였다. 공장주의 횡포에 맞서 부당해고와 임금삭감을 반대하고, 살인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열악한 작업환경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대동강가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단식농성을 통해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렇지만 본인은 1년 넘은 감옥생활로 건강을 잃어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처절했던 생을 마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공교롭게도 1932년 8월15일이었다.

또 다른 이는 윤형숙(1900-1950) 의사로 광주 수피아여고 재학 중인 1919년 3월10일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1000여 명의 맨 앞줄에 서서 강제해산시키려는 일본경찰에 맞서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이 크게 다쳤음에도 멈추지 않고 싸웠다. 4년간의 유폐생활을 마치고 불구의 몸으로 항일운동은 물론 문맹퇴치운동과 선교활동에도 매진했다. 해방도 잠시 6·25전쟁 중 인민군에 붙잡혀 서울이 수복된 날인 9.28에 흉탄에 사망했다.

이 두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가시밭길을 전혀 개의치 않고 걸었던 우리의 자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주룡 열사는 사후 75년 만에, 윤형숙 의사는 사후 54년 만에 노동계와 지역사회 종교인들의 간절한 뜻이 한데 모아져 겨우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포상 받았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뜨거운 열정으로 살았던 여성독립운동가를 후손들이 기리게 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과 기록을 밝히는데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 정부도 이들의 자료를 찾는데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처럼 미래를 위한 힘찬 걸음을 우리 스스로 걸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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