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가두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맘이 자라야 모든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도…

간밤에도 잠을 설쳐서인가, 새벽부터 콧물이 잠을 깨운다. 긴 가뭄 끝에 장마, 집중호우로 물난리, 겹치는 폭염, 과도한 습기로 안개가 온 창을 뒤덮고 이 혼돈스런 여름 날씨가 내게 지독한 코감기로 찾아왔나보다. 

이래저래 불규칙한 날씨로 외출이 어렵다보니 선풍기 아래서 방콕을 하며 TV 채널만 돌려댄다. 나는 아침에 방영하는‘인간극장’을 자주 보는데, 금주는‘청학헌의 부자유친’이 제목이다. 내용인즉 일산에 집을 두고 하던 일을 접고 제 가족을 떠나서 오십이 다 된 그 집의 막내아들이 구순이 훨 지난 거동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려고 강원도 강릉으로 내려와 아버지를 5년 째 정성으로 돌보며 사는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솟을대문에 아담한 한옥을 배경으로 청학헌(聽鶴軒)이란 현판을 내 건 고택의 풍광도 예뻤다. 자유업을 하던 자신이 직장에 매여 있는 형들보다 아버지를 모시기에 더 적합했다는 고백이나, 종갓집 장자로 평생 이 고택을 지켜온 아버지는 그 아들들에게 자기와 같은 길을 가게하지 않겠다고 외지로 자식을 다 내 보내셨다는 것.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 그 아버지를 잘 모시려는 막내아들의 수수한 모습이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30년 전쯤 우리도 결혼 초에 해마다 홀로 계시는 시어머님을 뵈러 생신 때, 명절 때 서울과 지방에서 형제들이 다 모여 잔치를 했었다. 위로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 있는 막내인 남편은 형제가 다 모이면‘쫑말이’란 이름이 전부였다. 잔치가 끝나고 마을 건너 편 금강이 흐르는 따방여울에 낚시를 갔다 오면 형제들은 모두 떠났고, 그제사 어머님은 우리 차지가 됐다. 남은 음식을 잘 갈무리 하고 국을 새로 끓여놓고 떨어진 비닐 장판도 갈아 드리며 가장 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나는 형제가 없이 자랐던 터라 여러 형제가 모이는 것이 참 부러울 때가 많았지만, 혼자 자라다보니 생각에 거침이 없었다. 충청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권위적인 절차를 알지 못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시어머님 고무줄 바지를 냉큼 주워 입고 어머님이 드시고 남긴 밥도 쓱 가져다가 국에 말아먹고 친딸도 못하는 짓을 맘대로 했던 것이었다.‘아가, 너는 내가 남긴 밥도 먹는구나’,‘아가, 너는 내 옷도 잘 맞는구나.’ 어머니는 그런 나를 좋게 보셨다. 서울 가서도 심심찮게 문안 편지를 드리곤 해선지 어머님과 관계가 좋았고 서먹함이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님과 갈등의 골이 깊었던 맏동서의 눈에 내가 고울 리가 없었다. 생신 때 시골에 내려갈 적마다 딴지를 걸었다. 소위 말하는 동서 시집살이였다.

난생 처음 누구로부터 거절당하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 나는 자존감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내 입장에 대해 쫑말이 남편이 입도 벙끗 못하는 어중간한 모습은 내심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남편은 중 고등학교시절 김천 형님댁에서 학교를 다니며 신세를 졌던 일이 있어선지 나로선 말도 못할 억울함을 당했음에도 남편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햇수가 거듭되면서 어머님 생신 때가 되면 어머님께 드리고픈 건강식품이나 화장품 등을 챙기게 된다. 그러고도 맏동서를 생각하면 맘이 쿵하고 땅에 떨어졌다. 한 번은 생신에 나는 못 가게 막고 막내 서방님(남편)만 내려가잖다. 남편에게 따져 물었다. 그때사 남편은 입을 열었다.“당신이 할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뿐이야. 당신이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 그 이유가 아니면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거지. 너는 가장 먼저 내 아내야.”

동갑인 남편, 시댁에선 힘없는 막내 쫑말이, 그러나 한 번씩은 결정적으로 내 편이었다. 내 발가벗은 속내를 다 받아주는 남편이었다. 결국은 그들로부터 내가 거절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가두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맘이 자라야 모든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오히려 명절이 아닌 때 가족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 갔고 결국엔 서울 우리(막내아들)집에 올라 오셔서 계시다 3년 만에 돌아가셨다. 

청학헌 부자유친이란 프로에서 주말에 대전 사는 형이 아버지를 뵈러 와서 휴가를 얻어 일산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상봉하고 모처럼 아내가 해 주는 맛있는 저녁식사 하는 자리에서 맞은편 자리에 앉은 그의 아들에게 PD가 물었다. 
아버지가 가장의 직무를 내려놓고 할아버지에게 가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싫지 않냐고.‘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아버지께 보고 배우는 게 더 많아요.’아마도 청학헌의 부자유친은 효(孝)라는 정신적 유산으로 대물림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감동이 물밀 듯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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