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작품 상설전시장 마련

▲ 나혜석 홀에 전시된 1928년 파리 유학시절에 그린 그녀의 자화상.

“여자는 작다, 그러나 크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강하다.”
나혜석이 1935년에 삼천리를 통해 발표한 글의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양성평등에 앞장선 페미니즘의 선각자로 자유인으로 당당한 의식의 주체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던 여성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 앞서간 그의 생각들이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냉대와 지탄의 대상이 돼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 가려져 오히려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나혜석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상설전시장을 마련했다. 

 

나혜석은 예술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 
“예술은 나의 일평생의 위안이요, 또 생활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취미요, 나의 직업입니다”
매일신보에 실린 ‘살림과 육아’라는 글에서 밝힌 그녀의 예술에 대한 관점이다.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학과에 입학했고 한국인 최초로 식민지였던 경성에서 1921년 유화 개인전을 가졌다. 서양미술이 생소하던 시절이었고 전공한 사람도 적었으며 더구나 여성이었으니 당연히 재능을 인정받고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930년 남편인 김우영과 이혼하며 발표한 이혼고백서가 더 센세이션을 일으켜 정작 그의 화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가려진 부분이 있었다. 

이에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은 나혜석을 재조명하며 수원 인계동에 나혜석 거리를 만들고, 나혜석에 관한 세미나를 열며 연구를 지속해 왔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상설전시인 나혜석홀도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자화상을 통해 본 나혜석
나혜석홀에 전시된 프랑스 유학시절에 그린 자화상(1928년 작), 남편이었던 김우영의 초상(1928년 작), 학서암 염노장(1938년 작) 등 3점의 작품은 수원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이다. 여기에 현대산업개발(주)에서 기부한 작품 나부(1928년 작)까지 총 4점이 전시돼 그의 예술세계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또한 나혜석홀에는 작품은 물론 나혜석 연보와 공간설명까지 곁들였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박현주 씨는“나혜석의 연보와 주요 어록은 거울을 통해 비춰봐야 바로 보일 수 있게 구성해 재미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나혜석이 태어난 1896년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다음해로 고종이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갔던 때다. 그가 활발히 활동했던 1920~1930년대는 일제치하의 암흑기다. 이런 시대에 다재다능한 재능을 발휘했던 나혜석은 남성 중심 사회와 가부장적 전통에 정면으로 맞서다 이혼 당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결국 행려병자가 돼 무연고 병동에서 슬픈 죽음을 맞았으니 불꽃같이 살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나혜석홀에 새겨진 이혼하며 남긴 나혜석의 글은 그가 원망했을 세상의 관습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더 마음을 아리게 한다. 마치 오늘날의 세상 변화를 예견한 듯하다.

여자는 집에서 현모양처로 지내야 편안하던 시대에 자아의식을 갖고 전통과 인습의 편견을 깨트리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화가 나혜석, 그의 숨결을 작품을 통해 수원에서 만나보자.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상설 나혜석 홀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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