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14)

동서고금에도 유행 존재…
한번 고개 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바람을 몰고 온다

▲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간송미술관 소장)

<한 부자 집에 13세 나이 어린 신부가 머리를 크고 무겁게 치장하고 긴장하여 앉아 있다가 시아버님이 들어오자 갑자기 일어서다 머리 무게에 눌려서 넘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 이덕무가 1741~1793년 사이에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조선조 부녀자들 머리 유행의 폐해를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 양가집 마나님들은 특히 헤어스타일에 남다른 집요함을 보였던 듯싶다. 성종 13년(1482년)의 기록은, 사치가 극심해서 여인네의 머리 높이가 4방 1척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 대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머리를 크고 높게 꾸미려면 가체(加髢:가발)가 있어야 했다. 이 가체의 값이 중인(中人) 열 집 재산을 넘을 뿐만 아니라, 그 머리를 장식하는 보석들까지 있어야 했으므로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까지 적지 않았다고 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임금님이 칼을 빼들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반복됐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 32년, 드디어 ‘가체금지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 ‘어명’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세 차례나 더 금지령을 내렸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유행은 더욱 드세졌다. 왕이 진 것이다.

정조대에 들어서는 우의정 채제공이 나서서 왕께 간곡한 말씀을 올린다. “비록 유생 같이 가난한 집에서도 60~70냥의 돈이 아니면 가체를 살 수 없고, 그럴듯한 것을 사려면 수 백금을 써야합니다. 그래서 땅을 팔고 집을 팔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둔 자가 며느리를 보더라도 머리를 높게 꾸밀 수가 없어, 혼인 후 6~7년이 되도록 시부모 보는 예를 행하지 못해서 인륜을 폐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라고. 별수 없이 정조도 그해 가체금지령을 내리면서, 명을 어기면 가장까지 엄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지켜지지 않더니, 급기야 단속원이라 신분을 속이고 돈을 뜯어내는 여자 사기꾼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포도청에 붙들려가, 엄벌을 받고 노비로 내쳐졌다는 기록도 있다.

가체는 순조(1800~1834년) 중엽에 이르러서야 뒤통수에 낭자를 트는 쪽으로 정착해간다. 그러면서도 궁중의 중요행사에서는 여전히 가체가 사용됐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순종비 가례도감의궤(왕실결혼에 관한 기록 1906년)에까지 가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조선왕조 말까지 가체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뜻있는 이들의 염려와 지탄, 그리고 견디다 못해 내려진 왕의 금지령도, 순종과 부덕을 최고 미덕으로 삼던 그 옛날 여인들의 유행을 막지 못했으니, 유행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미뤄 생각하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행은 언제나 존재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유행이 한번 고개를 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센 바람을 몰고 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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