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대한해협해전전승기념사업회 최경학 사무총장

호국보훈의 달 6월.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호국의 뜻을 기리는 달이다.
한국전쟁 67주년을 맞아 인터뷰 포커스를 호국보훈에 맞춰 국가보훈처로부터 6월의 호국영웅으로 선정된 고 최용남(1923.10~1998.11) 해군소장의 이야기를 싣는다. 최용남 제독에 대한 전공(戰功)은 그의 장남이자 대한해협해전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인 최경학 총장을 만나 들을 수 있었다.

6월25일 첫 해전 승리는
세계 전쟁사에 기억되는
한국전 중 빛나는 전투

연희전문학교 유억겸 교장
권유로 해군에 입대

“제 아버지 최용남 소장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최강 장군의 24대손으로 평안남도 용성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증조부께선 일제치하에서 독립자금을 출연할 만큼 애국관이 투철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1942년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셨어요. 연희전문학교 진학 후에는 독립운동 가문이었던 때문인지, 일본인의 핍박과 고초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고초를 피해 1942년 일본학도병으로 징집돼 입대했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이 돼 연대에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가 어수선해 복학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조선일보 지국장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조선일보 사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장이던 유억겸 교장을 찾아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자문을 구해보라고 했다더군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를 지키려면 해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유억겸 교장의 권유를 받아들인 아버지는 1946년 해군 참위로 임관했죠.”

국내 최초 전함이 된
미 퇴역군함 국내도입 중책

당시 우리 해군은 변변한 군함이 하나 없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 제독은 장교와 사병 모두에게 급여 10%의 각출을 제안한다. 그리고 해군 부인들은 손원일 제독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의 주도로 삯바느질과 군복세탁 등으로 미화 1500달러를 모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투함 구입을 청원한다.

이 돈과 이 대통령이 내준 45000달러를 합친 6만여 달러를 가지고 최용남 제독은 미국이 2차세계대전 시 썼던 폐선을 사러간다. 손원일 총장으로부터 해군창설 요원으로 중용된 최 제독은 폐군함 구입이란 중책을 부여받고 미국에 간다.

美 폐선, ‘백두산함’으로 명명
첫 함장으로 6월25일 북함과 교전

백두산함 함장이 된 최용남 중령은 6·25전 발발 당일 해군본부로부터 ‘6월25일 새벽 북한 함선이 상륙을 시도 중이니 동해안 묵호 근해로 긴급 출동해 격멸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진해에서 오후 3시 출항해 동해로 가던 중 오후 8시경 동북방 30마일 해상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시속 10노트로 남하하는 괴증기선을 일등수병이 발견한다.

이때 적선(敵船) 여부를 확인코자 ‘귀선의 국기를 보이라’ ‘언제 항구를 출발했는가’ ‘목적지 항구는 어디인가’ 수 십 번 발광신호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최 함장은 해군본부에 보고했고 상부의 적함격침 명령이 떨어지자 교전을 시작했다. 최 함장이 괴선박 500m까지 접근해 서치라이트를 비춰 확인했더니 완전무장한 북한군 병사 600여 명이 갑판에 승선한 1천 톤급 무장 수송선임을 확인했다.

이 북한증기선은 옥계를 경유해 부산 앞바다에 기뢰를 설치해 주일미군과 UN군 참전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육해양면 작전을 펼칠 적함이었던 것이다.
적함은 포가 2문, 기관포가 2문이었다. 백두산함은 3인치 함포가 1문에 중기관총이 1정이라 화력이 열세인 탓에 최 함장은 적함과 근접 사격을 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처음에는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포하고, 1000m, 500m로 접근하며 집중 발포해 적함을 격침시켰다.

적함에는 적어도 포탄 100발이 있었을텐데, 백두산함이 기습적으로 적함에 접근해 집중포화를 퍼부어 적함 내부에 있던 기뢰가 폭발했다. 전투 후 침몰지점을 확인한 결과, 적함의 시설과 북한병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부유물만 뜨는 것이 목격됐다. 6월25일 한국해전 최대의 승리를 거둬낸 것이다.
백두산함의 전사자는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 등 2명이었고, 이들의 전공을 기려 2010년 흉상이 세워졌다. 부상자는 김춘배 삼조 병장, 김종식 소위 등 2명이었다. 전투를 지휘했던 최 함장의 철모엔 수십 발의 기관총 탄흔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참전용사 중 12명은 아직 생존해 있다.

미 해군사관학교, 최용남 함장의
대한해협 승전을 교과로 삼아

이 대한해협의 승리를 두고 미국 군사전문가인 노만 존슨은 그의 저서 ‘6·25 비사’에서 ‘이 작전은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빛나는 승리’라고 기록했다.
또 다른 군사전문가인 에드워드 마롤다는 2007년 쓴 ‘6·25전쟁 중 미군해군’이라는 책에 북한 증기함선 격침은 부산항으로의 적 침투를 저지해 유엔군 생존에 핵심항구였던 부산을 지켜낸 쾌거였다‘고 격찬했다. 한편, 미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최 함장의 이 대한해협 승전 전사(戰史)를 교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 후 최용남 제독은 한국은행 금괴후송 작전, 서·남해안 봉쇄작전, 여수 철수작전 등에서 북한군의 해상침투를 저지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고,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해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1953년부터는 해병 학교장으로 부임해 해병 양성에 힘썼고, 이후 해병대사령부에서 작전국장, 참모부장 겸 군수국장,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최 제독은 혁혁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미국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1965년 5월15일 소장으로 예편해 사촌동생과 인쇄회사를 설립·운영했다. 유능한 인재였지만 국가보직 중용을 못 받고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1998년 76세에 작고했다.

활달·강직하고 무인의 풍모 지녀
최경학 총장은 아버지 최용남 제독이 해군으로 나라를 지킨 것에 큰 자부와 긍지를 가졌다고 말한다.
“제가 어렸을 때 늘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격은 활달하셨고 무인의 풍모를 지녔으며 강직해 정직을 강조하셨어요. 재직 중 모신문사 기자가 찾아와 부대원들이 기름을 빼내 판다는 제보를 듣고 가차 없이 이들을 퇴역시키는 용단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경찰들이 금괴를 가져와 직무이탈 배에 태워달라는 요구를 뿌리치고 금괴를 압수하고 국고에 입고시키는 패기를 보이셨답니다.”
최경학 사무총장은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호텔에서 미군참전용사협회가 개최한 6·25전쟁주제의 세미나에 초대돼 아버지 최용남 제독의 대한해협승전에 대해 영어 강연을 한 것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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