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어린 배 앞에서도
선택을 하는 일이
어렵기만하다.
어쩜 지금 우리의 삶도
선택의 결과가 아닐까…

봄이 오면 온통 메마르고 황량하게 비어 있는 공간에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온 산과 들이 생명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린싹은 점점 자라서 그 색이 짙어지고 녹음으로 가득 들어찬다.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히고 그것도 점차 굵어진다. 그러면 농가마다 그 열매를 수확할 때 먹기 좋을만한 크기로 잘 자라도록 열매솎기(적과)를 시작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도 5월에서 6월 안에 적과를 하고 봉지를 씌워야 하는 때에는 과수원마다 일손이 부족해서 시기를 놓치는 일이 많다.

처음에 우리집도 1200평에 450주의 배나무를 심었다가 나무가 점점 자라 간격이 좁아지다 보니 자꾸 베어내게 돼 10년이 지난 지금은 150주로 줄어들었다. 1천 평 남짓한 과수원이란 우리 부부 둘이 다 하기엔 벅차고 일꾼을 사기엔 좀 작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간신히 일손을 구해서 했는데 시골에 인구는 줄고 과수원은 늘어나서 충주의 인력시장에서 사람을 실어오고 외국인 근로자까지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다. 그래서 남편이 올해부터는 둘이서 할 수 있을 만큼만 배나무를 키우는 걸로 결정을 내리고 지난 겨울 50주를 마저 베어냈다.

적과하는 일에 서투르고 몸에 배지 않아서 그동안 나는 참과 점심 밥해주는 일, 간식을 준비하는 일을 주로 맡았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적과를 해볼 참이다. 한 화방에 7~8개의 열매가 달리는데, 남편은 그 순서를 봐서 크고 잘생긴 3~4번과 중에 하나만 남기고 모두 잘라내라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에 한 개를 두었으면 다음 것은 40㎝ 이상 띄워서 하나를 두고 나머지는 다 자르라 한다. 이미 적과를 한 나무의 열매를 보면 왕사탕 알만치 눈에 띄게 커져 있는 것이 그 까닭인 셈이다.  

남편의 적과 요령의 강조점이 잘라내는 데 있음을 명심하고 실전에 돌입했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나뭇가지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본다. 노상 배를 먹고 살았지만 엄지 손톱만한 솜털 보송한 초록의 어린 배가 형제처럼 종알종알 맺혀있는 것이 예쁘다.

바람이 많은 오늘 같은 날은 가지 아래로 내려오면 언덕에 핀 찔레꽃 코티분의 이국적인 향기가 온 몸을 휘감고, 사다릴 타고 가지 위로 오르면 뒷산의 아카시아 꽃향기가 멀리서부터 퍼져온다. 아직 서투른 터라 정작 남기고 싶은 놈을 자르고 작은 걸 남기기도 하고, 먼데 있는 걸 해결하려고 아슬아슬하게 팔을 뻗다가 앞에 있는 것을 눌러 통째로 부러뜨리기도 한다. 가위가 훅 나가 남김없이 몽땅 자르기도 한다. 남편은 나를 적과 파트너로 삼은 걸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싶다. 실수를 않으려고 땀 배인 안경을 고쳐 쓰고 화봉에 눈을 바싹 대고 작은 것부터 잘라내지만 마지막 두세 개는 쌍둥이같이 똑같이 크고 좋다, 자! 과연 어느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잘라야 하나….

이들을 자를 때마다 이유를 대고 양해를 구한다. ‘넌 큰데 흠이 있네~’ ‘넌 위치가 안 좋아~’ ‘너희들은 큰데도 너무 붙어있어 둘 다 아웃이야~’ ‘친구를 밀어주기로 하자. 미안해~’ 그것들도 모두 생명인데 내가 주인이란 명목으로 취사살생을 행한다는 것이 맘이 편치 않다. 너무 똑같이 큰 놈이라 도저히 선택할 수 없을 때 그냥 모른 척 남겨둔다.

어린 배 앞에서도 선택을 하는 일이 나는 어렵기만하다. 어쩜 지금 우리의 삶도 그때 그 시간 안에서 선택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닐까. 적과처럼 선택이란 하나만을 결정하고 나머지 경우의 수 모두를 버리는 일이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간 길/ 가지 않은 길, 알려진 길/ 모르는 길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젊은 날에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골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가보지 못한 길을 목을 빼고 넘겨다보지만 결국 우리 다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고 있지 않을까.
사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나무에 가려졌던 붉은 함박꽃 한 무더기 바람에 웃고 있고, 머리 위론 헬리콥터 한 대가 소리 내며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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