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임 순천대 사회복지학부 명예교수

"다양성 존중받는 글로벌시대에
농촌다문화여성들을 사회발전
동력으로서의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역량을 강화해 활용해야

다문화가족지원법, 농촌 특수성
고려한 실효성 있는
통합적인 정책으로 전환해
삶에 실질적인 도움 제공해야"

▲ 박옥임 순천대 사회복지학부 명예교수

3월8일은 109번 째 맞이하는 세계여성의 날이다. 미국 뉴욕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빵과 장미를 요구했던 날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노동권과 인권의 실현을 촉구하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 여성권한척도는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계층을 꼽으라면 결혼이주를 선택한 농촌다문화여성들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때 우리나라 여성들도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절대 빈곤시대에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이주한 역사가 있었다. 100여 년 전인 1910~1924년까지 탈빈곤을 위해 한국의 여성들이 사진신부(Picture Bride)라 해 사탕수수 노동자인 한국남성들의 결혼상대자로 생판 모르는 미국 땅인 하와이에 건너간 것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그들이 나중에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자금도 흔쾌히 내놓았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여성들인가.

지금 우리 주변의 많은 농촌다문화여성들이 안고 있는 갈등과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은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고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마음이 절실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꿈과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꽃은 피어나게 돼있다.

우리 지역에 농촌다문화여성이 매우 서럽고 힘든 여건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워낸 미담(美談) 하나를 소개한다. 이 여성 또한 결혼을 통해 삶을 바꿔보려고 한국에 왔는데, 결혼중개업자의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 사기결혼을 당한 것이다. 남편은 장애인이었으며 남편과 시어머니 모두가 까막눈인 문맹(文盲)이었다.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해서 다 팽개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벽에 부딪히고 체념하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죽을 힘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가서 다 놔버리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 때부터 한국어 공부를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이상 노력해 집에 와서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를 시작했더니 세상이 변했다. 같은 여성인 시어머니가 먼저 변하고 한글을 깨우쳤다고 좋아하니 다음에 남편도 변하고 나중에 친척들과 이웃들도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져 이 집에 복덩이가 들어왔다며 모두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가난하고 형편없는 집안을 탄탄하게 세워놨다고 인정해주니 이제는 이방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 오늘도 당당하게 지역사회의 소중한 일꾼으로 아주 잘 살고 있다. 말이 쉽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고통을 참고 이겨 냈는지 그 자체가 바로 인간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여성에게 어떤 동기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물었더니 아주 간단한 답변이었다.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으므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 농촌은 농촌다문화여성이 있음으로 해서 젊은 연령층인 농촌 남성의 도시유출을 어느 정도 감소시켜 농업의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농촌인구의 출산율 증가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 다양성이 존중받는 글로벌시대에 농촌다문화여성들을 사회발전 동력으로서의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농촌다문화여성들의 자기 주도적 방식의 관계형성이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지역사회 공동체로 확대돼 농촌에 활력이 넘쳐야 한다. 현재 다문화가족지원법이 발효돼 시행되고 있으나 농촌의 특수성을 고려한 실효성 있는 통합적인 정책으로 전환해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제공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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