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구월 들어서 경남 거제도에서 열린 ‘청마문학제’에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택시로 갈아타고 한나절이나 걸린 긴 여행길이었다. 거제도는 포도의 마을이었다. 논에선 벼 대신 ‘둔덕 거봉 포도’라는 이 지역 특산물이 익어가고 있었고 햇볕은 그만큼 뜨거웠다. 거대한 파도 거품처럼 늘어선 비닐하우스보다는 맨땅이 보고 싶었지만, 이는 철없는 도시 사람의 사치일 뿐 비닐하우스 안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 지역에 적합한 품종을 발견해 포도농사가 논에서 정착하기까지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 견디며 이겨냈고 지나감을 믿었으리라.

포도는 잎과 줄기가 다 나오고 난 뒤에 꽃을 피운다. 꽃 진자리마다 눈물처럼 박히는 것이 포도알이다. 낯선 논에서 뿌리를 내리고 익은 거봉포도라서 였을까. 눈물은 짠데 껍질을 벗기고 맛본 투명한 포도알은 달기만 했다.
뿌리를 옮기며 흔들리는 일이 어디 과실뿐일까. 도종환 시인은 노래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포도를 보면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이십 대엔 포도밭에 가서 미팅한 적이 있었다. 얼굴 가림이 심한 내게 주렁주렁 달린 포도는 최고의 방패였다. 가까이에서 맡는 짙은 포도 향이 좋았고, 까만 눈망울 같은 포도송이는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그때엔 포도밭이 낭만을 줬다면, 나이 들어 포도밭을 지날 때 느낌은 복합적이다. 아무리 높은 가지에 열린 포도라도 꼭 따야 하는 게 젊은 날의 삶의 자세였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에 나오는 여우처럼 불가능한 목표는 ‘신포도’라고 포기하는 판단의 기준도 용기다.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세워서 다가갈 때 행복해진다는 지혜를 세월이 가르쳐줬다.

‘포도밭 예술제’가 열리는 곳이 있어서 간 적이 있다. 먹거리에 재미를 더하니 포도밭을 찾은 보람과 재미가 있었다. 포도밭엔 시(詩)가 걸려있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었다. 포도밭에 문화요소가 결합하니 신선했고 축제가 되었다. 제철 없이 과일을 사 먹을 수 있는 시대라지만 이맘때 나오는 거봉 포도는 놓치지 않는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농작물의 재배방식이나 판매 방식도 역발상의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시대인가 보다. 잘 거둔 수확물이 문화와 어우러지면 판로도 다양해질 것이다. 고정관념의 뿌리를 옮겨보는 일. 다음엔 논에서 무엇이 수확될지? 기대감으로 달라질 풍경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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