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덕의 농담(農談)<19>

최근 도시민들의 귀농귀촌이 활발하다. 이들 중에는 성공적인 농촌정착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도 있고, 낯선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도 있다. 본지는 재밌는 한상덕 씨의 생생한 귀촌일기 연재를 통해 후배 귀농귀촌인들의 시행착오를 덜어줄 지름길을 알려주고자 한다.

정원에는 잔디와 함께 장미터널이 있어야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속으로 ‘장미 정도는 있어줘야 폼이 나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장미터널을 지키는 게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우선 줄기에 돋아난 뾰족한 가시가 여차하면 찌르고 할퀴는 통에 정돈하기가 쉽지 않다. 자른 장미를 치우는 건 또 얼마나 성가신지. 불에 태우기도 땅에 파묻기도 쉽지가 않다. 게다가 피어있을 때 잠깐뿐이지 땅에 떨어진 장미는 또 얼마나 추한지. 애벌레가 먹은 장미는 또. 그리고 비에 젖은 장미는 또, 또...

그런데도 장미를 버릴 수가 없었다. 장미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게 아니라 우유부단해 대담하게 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이었다. 나뭇가지 하나도 잘 치지 못하는 내 욕심 때문이었다. 잘 사는 일은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놓고도 정원에 있는 장미 하나에도 적용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장미나무를 없애고 수세미를 심은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장미는 사람이 일일이 묶어서 터널을 만들어야하지만 수세미는 덩굴손을 이용해 감아서 올라가기 때문에 사람 일손이 필요하지 않다. 또 요즘 같은 폭염에도 끄떡없이 잘 자라주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늘까지 만들어준다. 그뿐인가. 어린 수세미는 먹을 수 있고, 다 자란 수세미는 세재로 씻은 그릇을 다시 헹굴 때 이만한 게 없다. 열매와 수액은 한방 약재로도 사용된다지만 사용해 본 적이 없어 이 부분은 패스.

그랬다. 수세미를 심지 못한 건 편견 때문이었다. 멀쩡한 장미 대신 수세미를 심는 일이 촌스럽고 궁하게 보일 것 같아서였다.
편견은 차별의 사촌쯤에 해당한다. 자신을 우월한 지위에 놓고 누군가를 깔보고 무시하는 행위를 나쁜 짓인 줄도 모르면서 공격하는 인간형을 만든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그런 행동은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의 발로이지만 편견은 여기에 눈을 감게 만든다. 자신은 똑똑하고 훌륭해서 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것도 편견이 명령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호박꽃도 꽃’이란 말도 일종의 편견이다. “나는 장미꽃이고 너는 호박꽃이지만 너도 꽃으로 인정해줄게”라는 나르시시즘이 만들어낸 병리적이고 덜떨어진 명제다.
호박은 꽃이 아니라 열매가 유용하고 장미는 관상용이 먼저고 수세미는 꽃도 예쁘고 열매는 열매대로 유용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수세미가 제일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들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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