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입술이 하얗고 윤기가 없었다. 맨 입술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급히 오느라 립스틱을 바르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옷을 잘 입고 폼 나는 가방을 들었어도 입술에 생기가 없으면 허사다. 립스틱은 화장의 마무리로 정점을 찍는다.

립스틱 색이 잘 어울릴 때 여자 얼굴은 마른나무에 물을 준 것처럼 생기가 돌고 꺼진 램프에 불을 켠 것처럼 환해진다. 어찌 보면 여자에게 립스틱은 변신을 주는 작은 마술봉 같다. 립스틱을 바르고 안 발랐을 때와 색상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주니 말이다. 붉은색을 발랐을 때는 정열적이며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와인색이나 무채색 계통의 립스틱은 차분하며 이지적인 느낌이 든다. 차가운 색상을 바르고 입을 꼭 다문 채 근엄한 자세로 있으면 그 상대 앞에서는 말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하게 된다.

입은 말이 나가는 통로다. 입구의 색상에 따라 도도하거나 혹은 엄격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귀엽거나 푸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립스틱은 입술의 표정을 쥐락펴락한다. 립스틱은 불경기일수록 잘 팔린다던가. 우울할 때 도발적인 색을 바르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화장대에는 기분에 따라 연출하는 여러 색상의 립스틱이 있다. 누가 줬는지도 가물가물한 붉은 립스틱이 그냥 모셔져 있었다. 관능적인 그 색상은 뭔가 로맨틱한 분위기에 발라야 잘 어울렸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날이 더우니까 별생각이 다 든다. 문득 드라큘라 생각이 났다. 피 흘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드라큘라 사진을 집안에 걸어놓으면 등골이 오싹해지려나. 전기요금이 폭탄처럼 날아들까 봐 에어컨을 밤새 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열대야라 잠이 안 왔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옆 사람을 깨웠다. 기겁을 한다. 난데없는 ‘드라큘라 이벤트’는 대성공이었다. 순간 방 안의 온도가 5도는 내려간 것 같았다.

여자가 짙은 색 립스틱을 발랐다고 열정적, 긍정적으로만 해석했다간 잘못일 수 있다. 가수 임주리는 노래했다. “내일이면 잊으리, 마지막 선물 잊어 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교통신호등이 빨간색 일 때는 ‘정지’하라는 신호처럼 붉은색 립스틱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하라는 경고일까. 치명적 유혹일까. 입술에 곱게 바른 립스틱은 말이 아닌 색상과 표정으로 제시되는 언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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