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 김기숙 씨의 삶, 봉사, 역경을 버무려 40여년을 살아오니...

▲ 시화전에 걸었던 김기숙씨의 시 ‘상상화’ 판넬 옆에서. 현재 김기숙씨는 시인으로 등단하기 위해 열심히 시 쓰기를 즐기고 있다.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중 이번 호에는 김기숙 씨의 ‘삶, 봉사, 역경을 버무려 40여년을 살아오니...’를 싣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농사일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일기를 봐야 하고 제때 씨를 뿌려야 한다”

힘든 가을일이 끝나고 연꽃밭에 가서 연꽃한테 욕을 실컷하고 가을 휴가를 다녀 왔다. 속이 시원하다.
꽃이 피었을 때 다녀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옛날 속담에 갓 마흔에 시집가려니까 날이 속을 썩인다고 오늘 내가 그 심정이다.
불청객인 가을비를 원망하며 비 그치기만을 기다리면서 2박3일로 식구가 놀러가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가족이 놀러가려면 서로가 시간내기란 어려운 일이거늘…

겨울 날씨 치고는 따뜻한 날이다.
남편은 어디 가서 자고 오는 것을 싫어한다. 막내딸이 간신히 아빠를 졸라서 같이 가기로 하고 현관문을 나가는데 전화가 온다. 남편과 나는 서로가 전화를 받으라고 눈치를 한다. 결국엔 남편이 받는데 전화 속의 목소리는 여자다. 내용인 즉은 내일 비가 온다고 하니까 마늘 밭을 갈아 달라고 하는 얘기다. 목소리의 주인공는 현미 엄마다.  
벼 바심이 끝나자마자 가을비의 불청객인 비가 계속 오더니 마늘 심을 기회조차 주질 않는다. 마늘 쪼개놓은 지가 한 달은 되나보다. 비가오기 전 따뜻한 날에 일찍 심은 마늘이 누구네 할 것 없이 싹이나서 걱정이고 안 심은 마늘은 뿌리가 썩어서 걱정이다. 마늘 못심은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대답은 이렇다.

“오늘 가족이 한데 모여서 워디를 가기로 했어유, 밭은 더군다나 질어서 트랙터가 들어가지도 못해유” 한다 오늘중으로 마늘밭을 갈아달라고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않고 졸라댄다. 결국엔 저녁에 와서 갈기로 약속을 했다.
주변머리가 없는 것인지 내가 못난 것인지 농사일을 핑계로 우리 내외는 별도로 어디 구경을 가본 일이 없다. 남들과 함께 1박 2일을 몇 년에 한 번씩 갖다 온 것이 전부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아이들을 핑계삼아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놀러 가기로 했다. 몸이 잘 따라주어서 올 일 년은 건강하게 농사도 잘 지었다. 아이들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있는한 건강해야 한다.

숙소는 부여 롯데리조트로 하룻밤 자는데 비용은 60만원이란다. 쌀값을 계산해 보니까 쌀 팔아서는 못 올 곳이다. 쌀이 네 짝값도 넘는다.
쌀농사가 전업이다 보니 무엇이든 쌀값에만 비교가 된다. 그러나 저러나 아이들이 저질러 논 일이니까 주는대로 먹고 추억에 남을 구경만 하고 놀다 오면 된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부여 궁남지다. 초겨울이건만 날이 하도 좋으니까 개나리가 노랗게 피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개나리가 봄으로 착각했나보다. 궁남지 놀이터에 손자들을 풀어놓았더니 마냥 뛰어논다. 다음에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삼천궁녀가 빠져죽었다는 바위도 가 보았다. 거기에서 내려가 황포돗단배를 타고 한바퀴 휭돌아서 왔다.

선장한테 “여름에 강물이 말랐어요?”하고 물어보니까 아니란다. 강물이 마르지 않은 까닭에 여름내내 관광객을 편히 모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다행이었네요. 서산은 가물어서 소낙비로 농사를 지었어요.”  
재롱둥이 세 살배기 손자가 이제 말을 배우는데 “하~암 짐에 가요”한다. 제 엄마가 통역을 하는데 “할머니 집에 가요”라고 하는 말이란다. 한 두 발짝씩 걸음마를 배울 때는 오뚝이처럼 수도없이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쉬지도 않고 노력하더니 첫돌 때는 제대로 걸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것도 세상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하물며 어느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노력도 하지 않고 뜬구름 쫓아다니다 세월만 보내는 사람도 보았다.

궁남지에는 연꽃도 유명하지만 거꾸로 늘어진 수양버들 또한 멋있어 보인다.
연꽃이 한창 피었을 때 숱한 사람들이 연꽃을 보고 욕을 하면서 지나갔을 상상을 하면서 연꽃밭을 지나간다. 연꽃은 그냥 지나가면 안된다. 욕을 하면서 지나가야 어떤 연꽃인지 알 수가 있다. 연꽃은 없지만 팻말이 있었다. 이년은 쌍련이구, 이년은 밤에 피는 야한 련, 이년은 홍련, 이년은 백련, 욕를 실컷하고 지나오는데 점잖은 연 두 가지가 있다. 빅토리아연, 핑크 앤 옐로우 연, 팻말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꽃 이름이 참 재미있다고 나한테 더 해보라고 한다. 궁남지 주변을 돌아보니 허허벌판에  많지 않은 관광객 몇 사람과 우리가족뿐이다.

마늘밭 약속 때문에 하루 구경만 하고 남편은 저녁에 집으로 왔다. 농사일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일기를 보아야 하고 제때에 씨를 뿌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낸 것은 겨울나무뿐이다. 여름에 꽃이며 열매 잎사귀가 나무와 동무를 했는데 이젠 아무도 없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털어냈으니 나무도 바람이 불어도 걱정없고 홀가분 하겠지. 아름다운 열매를 가을에게 다 내어주고 내년에는 나무들도 다시 잉태를 해야 한다. 올 가을 날은 참 따뜻했다. 비 한번 안 오고 가을은 그렇게 깊어갔다. 밭곡을 거두는데도 신바람이 났다. 콩을 거둬서 마당에 널면 도리깨로 투드리기 참 좋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제일 작은 녹두알은 성질이 못됐다. 꼬투리를 벗어나는데 야멸차게 톡 튀어서 멍석을 벗어나간다. 가문 날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기에 안성맞춤이다. 가뭄이 계속 이어지다가 소낙비가 두어 번 오자 김장밭도 해결하고 큰 걱정이었던 생강 캐는 걱정도 덜었다.
생강은 뿌리를 캔다고도 하고 잎사귀를 자른다고도 한다. 생강에 붙은 잔뿌리를 뜻어내고 부러지지 않게 예쁘게 캐면 된다.

가을날이 날마다 좋을 줄 알고 사람들은 내 일을 제쳐두고 생강캐는 일을 다녔다. 하루에 6만원이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생강 캐는 일이 끝나면 겨우내 놀아야 한다.
일만 다니다 마늘을 심지않은 것이 화근이다. 아침에 전화를 걸어온 현미 엄마가 그렇다. 그밖에도 여러 집이나 있다. 그 집도 주인 여자가 생강을 캐러 다니느라고 못심은 것이다. 마늘을 쪼개 놓고 관리를 잘 했어야 되는데 잘 못해서 뿌리가 상했다고 두 내외가 날마다 싸워보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러나 저러나 눈이 그치면 비가 오고 비가 그치면 땅이 질고 언제 마늘을 심을 것인지 하늘에게 물어보고 싶다. 내 나이 육십중반을 넘었지만 마늘을 못심은 것은 평생 처음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벌써부터 탁상행정의 말이 나온다. 마늘값이 어쩌고 양파값이 어쩌고 지난 여름에는 양파값이 고공행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농민에게 받아진 돈은 종자값에 불과했다. 중간상인이 장난을 친 것이다.

농촌에는 농민들이 만들어낸 속담이 있다. ‘여름에는 주인이 도둑놈이고, 가을에는 일꾼이 도둑놈’이란다.
여름에는 해가 길기 때문에 주인은 일꾼을 실컷 부려먹는데서 나온 이야기이고, 가을에는 해가 짧아서 일을 조금하고 품삯을 받는데서 나온 이야기다. 옛날에는 농촌에 사람이 많으니까 일꾼 얻기도 수월했다. 그런데 농촌인구가 줄고 노령화 때문에 일꾼 얻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동네서 얻기가 어려우면 용역에서 일꾼을 얻어서 일을 하는데 참 가관이다. 서산에는 주로 마늘과 생강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많은 여자 일꾼이 필요하다.

마늘은 창으로 캐야하는데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창질을 할 줄 몰라서 마늘통을 찍어놓는다. 찍어놓은 마늘은 상품가치가 없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농촌에서 살면서 일로 늙은 우리들은 경력이 몇 수십 년이 되었다. 마늘이나 생강도 부스러지지 않게 잘 캐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옛날에는 생강을 캘 때 한 두둑에 두 명씩 한 조가 되어서 캤는데 노령화 되다보니까 용역에서 중국남자들을 데려다 뽑아주면 여자들은 앉아서 생강 잎사귀를 잘라낸다. 중국 남자들은 자기네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일을 하는데 우리들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이럴 땐 중국말을 배웠으면 좋으련만, 반대로 중국 사람들 한국말을 모르니까 점심때가 되면 손짓 발짓 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일을 하다 어떤 할머니가 중국사람들한테 주먹구구식으로 “아이 러브 유”를 하니까 못 알아듣고 쳐다만 본다. 우리들은 할머니한테 “할머니 젊은 사람한테 ‘아이 러브 유’를 하면 워떻게 해유” “그냥 해본 소리여” 일을 하다말고 일꾼들은 한바탕 웃었다. 집에서 종일 일을 하면 웃을 일도 없는데 하루나가면 쌀 반짝 값을 벌고 구경도 다닌다. 15인승 봉고차를 타고 새벽 5시부터 가면 마늘 밭이나 생강밭은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철석철석 비릿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한다. 날마다 소풍을 간다.

마늘을 많이 심는 이곳은 마늘을 캐고 나면 마늘밭을 덮었던 폐비닐이 산과 들에 흩어져 볼썽 사나웠다. 또 농약병도 마찬가지로 논두렁이나 하천에 나뒹굴어서 발을 베기도 하고 농촌 어느 곳에서도 골칫거리이자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70년대 나는 결혼을 해서 첫 아이를 낳고 빈혈이 찾아와서 5년을 힘들게 살았다. 빈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길을 가다가도 빈혈이 찾아오면 길에 주저앉아 누가 나를 데려다 주기를 기다렸다. 빈혈이 나면 토하기를 몇 번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큰병원에 가도 병은 아니란다. 잘 먹기만 하면 된단다. 병이 길어지자 시부모님과 남편도 나에 대하여 시들해진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나는 언제까지 빈혈과 싸워야 하나 섧기만 했다. 친정어머니는 아픈 딸을 위해 없는 돈을 쪼개서 약을 사가지고 오시기를 여러 번, 어느 날은 어머니께서 빈혈에 좋다고 소 간을 사가지고 오셔서 먹으라고 하셨지만 입에서 받아주지를 않아서 먹지 못하고 말았다.
시아버님은 나를 위해 무당을 데려다 경을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경도 읽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시어머니는 나를 친정으로 쫓아보내야 한다는 말씀까지 하시는 바람에 나는 어린 것 젖을 물린 채 밤새 울면서 이별 연습을 했다. 아가는 낳은 지 5개월 정도는 되었나 싶다. 없는 살림에 간신히 나를 결혼시켰는데 내가 가면 엄마 걱정이 앞선다.

“아가 많이 먹어, 이 밤을 자고나면 너와 나 이별이야” 남편한테 말도 했다.
“나 내일이면 어머니가 집으로 보낸대유, 가라면 가지만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가라고 할까요, 떼놓고 가라고 할 까유, 집에가면 엄마 혼자서 사는데 돈이 없으니깨 나는 죽어유”
남편은 한마디 말도 없다. 나는 그 밤 뜬눈으로 지샜다. 우리 이웃동네에 나와 같이 결혼을 해서 나는 아기를 낳았지만 같이 결혼을 한 새댁은 몸이 아파서 고치다 못고치니까 친정으로 보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시어머니가 나도 친정으로 보낸다고 한 것 같다. 울기도 많이 울고 언제나 혼자였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면서 시어머니 눈치를 본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시어머니가 홧김에 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5년동안 빈혈과 싸우면서 나는 세 번째 아기를 임신했다. 임신 3개월 되던 달에 순영이 엄마가 나보고 보건소에 가서 빈혈 약을 받아다 먹으라고 한다. 순영이 엄마는 본인도 임신을 했는데 빈혈이 생겨서 약을 받아다 먹는다고 했다. 나는 단숨에 가서 그동안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아기를 낳을 때까지 약을 먹으라고 한다. 약은 조그만한데 녹두알같이 생겼다. 하루에 한 알씩 먹으라고 했다. 7개월을 먹는 동안 빈혈의 숫자는 줄어갔다. 아기를 낳고 빈혈이 찾아왔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다시 보건소를 찾아가서 빈혈 약을 타러 왔다고 하니까 보건소 직원 하는말이 “이제는 미국 원조가 끝이 나서 못드려요” 한다. 그 약은 미국에서 원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 후로 빈혈은 알게 모르게 싹 가셨다.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동네 부녀회를 결성한 것은 75년도 쯤 된 것 같다. 동네에는 부녀회가 있었는데 회원들이 콩을 한 줌씩 거두고 재도 한 삼태기씩 거두어서 둑에다 콩을 심었다. 콩바심을 했는데 몇 말을 했는지 회장이 밝히지 않는 바람에 회원들이 나보고 회장을 하라고 권한다. 빈혈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고 평생 빈혈과 싸우면서 살 줄만 알았다가 빈혈이 싹 가시니까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회장이 되어서 참 열심히 일하고 계산도 부녀회원들 궁금하지 않게 모든걸 다 밝히면서 적었다.

회장 12년동안 총무도 겸직했다. 부녀회원들과 의논해서 회비 모은 것과, 콩을 심어 얻은 수익금으로 종자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했다. 가스통에 불판 세 개를 달아서 세를 놓아 벌어들인 돈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나는 회의날 어른들 경로잔치를 하자고 제안했다. 제일 말이 많은 회원이 “내 부모도 못해 주는데 누구 경로잔치 해주어” 하고 삿대질을 하면서 안 된다고 막무가내다. 여러번 회의 끝에 경로잔치를 해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수건 200장 주문해 놓고 시내에 취미로 봉사를 하러 다니는 사물놀이팀도 초청해서 부녀회원도 함께 어우러져 흥에 겨운 날이었다. 살아계신 어른들은 요즘도 가끔 내 이야기를 한다. 너무도 애쓰고 자금도 많이 장만했었노라고.

폐비닐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폐비닐은 마늘을 캔 이후가 제일 심하다. 둑에 널브러진 폐비닐이며 심지어는 농약병과 산골짜기에 헌냉장고등 각종 쓰레기를 양심과 함께 버리고 가는가 하면 시커먼 연기를 품으며 태우기도 한다. 하늘이 무섭다. 언제부터인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이뤄졌다. 나라에서는 폐비닐값을 조금 보조해 준다고 폐품을 모으라고 해서 처음 시작하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폐품 가짓수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맥주병, 캔, 농약병, 박스, 쇠붙이, 폐비닐, 비료포대, 각종 잡쓰레기, 헌 텔레비전, 냉장고, 여러 가지 병종류, 분리를 하는데 정확하지가 않다. 산더미처럼 쌓여진 폐비닐을 일륜차나 경운기로 모두 실어다 집합 장소에 갖다놓는데 거지가 따로 없다. 땅에서 주워서 오는 폐비닐 때문에 흙과 땀으로 범벅된다.

집합장소에 박스를 미리 갖다 놓으면 지나가는 고물장수가 다 가져가는 바람에 집에다 두었다 가지고 나간다. 폐품 수거하는 날 회원이 빠지면 벌금이 2만 원이다. 벌금 2만 원 안 내려고 이 핑계 저 핑계 잘도 둘러댄다. 일년에 세 번씩 폐품을 하니까 동네가 조금씩 깨끗해지기 시작한다. 내버리는 폐품이 돈이 되니까 길거리 가다가도 농약병을 주워온다. 깨끗한 동네가 되었다.

나는 고민이 또 하나 있다. 옛날에는 애경사를 집에서 치르기 때문에 집에나 동네에서는 잔치하는 그릇을 모두다 장만 했다. 잔치때만 되면 여자들은 꼼짝없이 종일 설거지를 했다. 잔치때 설거지 하는 것이 싫은 여자들에게 희소식이 하나 전해왔다. 일회용 그릇이 등장한 것이다. 없는 형편에 장만한 그릇들은 일회용 그릇에 밀려 컴컴한 창고지기가 되어 언제 바깥세상으로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잔치 때나 동네 대동회의날 쓰던 일회용 그릇은 재생도 안 되고 그냥 버리니까 돈을 내버리는 것 같아 광에 있는 그릇을 꺼내서 쓰자고 회원들한테 제안했다. 알게 모르게 회원들은 일회용그릇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고 “대동회날 누가 설거지를 하냐고요” 나이 어린 회원이 대거리를 하니까 그녀의 짝꿍도 합세한다. 모든일에 솔선수범하는 나는 남편한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작을 한다. 스텐수저 200개를 사서 회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누가 요즘 촌스럽게 일회용 그릇을 써요?” 1회용 그릇을 안 쓰려고 회원들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대거리 하면서 밀고 나갔다.

“남의 동네는 일회용 그릇을 안 써요” 우리 동네는 120호에 반이 네 개 반이었는데 빌라가 몇동 생겨서 다섯개 반으로 늘었다. 각 반장님들과 지도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동네 행사를 할 때마다 일회용 그릇으로 내버리는 돈이 20만~30만 원이니까 우리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일회용 그릇을 쓰지 말자고 했다. 회원들 중에 계속 대거리를 하면서 안 된다고 한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광을 지키고 있는 그릇을 꺼내다가 회관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안 그러면 목소리 큰 사람한테 질 것만 같았다. 광에서 그릇을 가져 왔는데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너무 더러웠다. 퐁퐁을 넣고 뜨거운 물로 회원들이 닦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다. 광을 지키던 그릇들중에 주전자는 빠졌다.

소주와 맥주가 자주 등장하면서 막걸리는 순번이 뒤로 물러났다. 쌀 소비를 하려면 옛날처럼 집에서 막걸리를 만들어야 하고 주전자가 필요하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주전자는 쓸모가 없으니까 왕따를 당했다. 그리고 부족한 그릇 중에 뚝배기만 통장님과 상의해서 사다놓았다. 그릇이 모아지니까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설거지를 않겠다고 버티던 회원도 좀 수그러든다.
회관에 일회용 그릇을 안 쓰니까 쓰레기 버릴 염려도 없고 그릇은 깔끔해서 쓰기도 좋았다. 젊은 사람들은 객지로 나가고 동네 어른들은 노령화가 되다 보니 인구도 줄고 동네 땅도 외지 사람이 많이 들어온다. 옛날에는 먹고 살기가 급급해서 공부를 많이 못했다. 그래도 그냥 그런대로 길쌈을 해서 옷을 만들고 목화를 심어서 솜바지, 저고리를 해서 입었다.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자급자족을 해서 허리띠 졸라매고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쳐 놓았다.

자식들은 열심히 가르쳐 놓았지만 정작 농촌에 있는 어른들은 까막눈이라 답답한 마음에 회관에다 문해교실을 시작했다. 글씨를 모르는 문맹자가 배우는 것이 문해교실이다. 시(市)에서는 성인문해강사 양성과정을 거쳐 원하는 마을 회관이나 평생학습관에서 가르친다.
우리동네 어른들은 처음 회관에서 한글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신바람이 났다. 아라비아숫자나 한글을 드믄드믄 알아서 전화는 간신히 걸고, 세금종이가 나오면 이웃으로 읽으러 다니는 분들이다. 그런데 읽는 것은 조금 읽는데 연필로 쓰는 것은 영 못한다. 성인문해 초등과정 교과서인데 제일먼저 배우는 책 이름이 ‘소망의 나무’였다. 그리고 차례대로 배움의 나무, 지혜의 나무, 세 과목을 3년에 걸쳐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배우면 초등학교 졸업자로 인정을 해준다고 했다.

최 할머니는 1학년 다니다 말고 서울로 돈벌러갔다고 했다. 평상시에 글을 쓰는데 받침 없는 글과 띄어쓰기도 못했는데 올해 3년 째로 제법 잘 쓰는데 한 단계 올라가 ‘시’도 써본다고 하면서 글 배운 것이 너무도 좋단다. 다른 할머니들은 숙제를 해오라고 하면 “글두 모르는데 숙제는 무슨놈의 숙제를 날마다 낸대유”하고 대거리를 한단다. 그리고 말귀를 조금 먼저 알아듣는 할머니는 선생님 보는데서 “이리 주어유, 내가 대신 숙제 해 줄게유” 하고 으시댄다나 어쩐다나, 하고 “나는 죽어두 글인지 뭔지 안 배울거여 80이 넘도록 이때까지두 살었는디 이젠 그만 다닌꺼여”라고 떼를 쓰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책을 보고도 못 쓴단다.

공부를 하는 날이면 서로가 잘한다고 히득거리고 안듣는 곳에서 누구는 어떻고 흉을 보는 소리를 하면 옆에서 듣는 우리들은 재미 있다. 영어 알파벳과 산수도 배우는데 너무도 어렵다고 하면서 개근상을 타야 한다고 열심히 다닌다. 나는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놀아도 공부하는 곳에 가서 놀아요” 한다.

우리동네 공부하시는 학생들에게 모두다 “화이팅”을 외쳐본다.
미우나 고우나 한 남자를 만나 제일 잘난 사람으로 착각하고 43년 굴곡진 삶을 사는 동안 남에게 베풀고 봉사하면서 살으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많은 봉사는 아니지만 꾸준히 몇 수십 년째 봉사를 하면서 살아간다. 봉사란 단어가 몸에 배었다.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봉사를 하려고 한다.

▲ 남편 유재호씨는 사진찍기를 싫어한다며 한걱정했는데 순순히 포즈를 취하자 김기숙씨는 “성공했다”며 좋아라한다.

■ 현장 인터뷰

고단한 농사일에 문학활동과 봉사가 삶의 활력

 작은 봉사에서 조직적 봉사까지…
“좋아서 하는 거라 힘들지 않아요”

글 쓰는 재미에 농사일 고단함 잊어
“농어촌여성문학회를 1박2일 댕겨오느라 농사일이 밀렸어요~” 아침나절 한바탕 일을 하고 이제야 한숨 돌린다면서 김기숙씨가 말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학회 얘기, 글 쓰는 얘기에 한마디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70을 바라보는 시골 할머니에게 농사꾼의 고단함을 덮을 만한 뭔가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김기숙씨에게 그것은 바로 ‘글 쓰는 재미’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김기숙씨는 1997년 농어촌여성문학회 2집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매년 하계문학회를 갖는데 이번에도 각자 생산한 농산물을 아낌없이 가지고 나와 모임이 풍성했다고 입에 침이 마른다.
“다덜 농사짓는 사람이니께. 피부가 꺼멓지 뭐여~ 그랴서 ‘여기 시커먼스들 모였다!’고 혔더니 웃고 난리들이었슈” 어디가나 재밌는 말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김기숙씨는 글에도 그 유머가 묻어나 있다. 그 중에서 풀을 의인화해서 쓴 ‘풀과의 협상’이라는 글은 많은 회원들이 공감한 글이라며 애정을 표했다.

문학회뿐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서산지역신문 기자활동, 충청남도 도청 명예기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많은 농사일을 해가면서도 신문이며 문학작품을 자주 읽는다는 김기숙씨는 마감이 다가오면 커피를 마셔가며 새벽녘까지 글을 쓴단다.
김기숙씨의 수기는 본지 뿐 아니라 한국농어촌공사나 충남도청이 주최한 공모전에서 여러 번 수상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다 쓰지 못한 것들이 있어 아쉬웠다는 김기숙씨는 또 쓰고 또 써도 늘 새롭다고 한다.

글을 쓰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특강하러오는 교수에게 첨삭지도를 받아가며 공부한 결과 2010년 ‘등잔불’이라는 수필로 신인상을 받으며 106호 ‘수필과 비평’에서 등단했다. 등단 후 서산시내에 있는 서주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김기숙씨는 충청도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문장으로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작품화한 이문구 소설가의 글체를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단다.

봉사가 별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결혼 전 친정어머니는 항상 “남을 도와라, 보따리만 들어다 줘도 도와주는 거다. 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행동으로라도 도와라”며 없이 살아도 남을 도와주는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단다.
빈혈이 치유되고 80년대 부녀회활동을 하면서 김기숙씨는 주변의 소외된 노일들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별거 없이 시간 날 때마다 말벗해주고 물렁한 음식이 있으면 가져다주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해주는 것이쥬~” 봉사라는 거창한 말로 말하기 남부끄럽다고 한다.

또 김기숙씨는 20여 년간 대한적십자서산지구협회 수석동 회원으로 새터민들의 도우미로 활동 중이다. 작년 적십자 100주년 기념 책자에 새터민을 딸로 삼아 지낸 김기숙씨의 수기 ‘가슴으로 낳은 복덩이 딸’이 실려 출판되기도 했다.
작은 봉사에서 조직적인 봉사까지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김기숙씨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데 좋아서 하는 거라 힘들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단다.

챙겨주지 못해도 힘이 되는 가족
농사일을 해가며 이러저러한 기자활동에 봉사활동까지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명예기자 활동으로 대전방송 ‘아침마당’에 출연하기도 하고, 어려운 농사일에 봉사활동까지 한다고 ‘다큐멘터리 6054’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스타 나왔다며 우수개소리를 해도 남편 유재호씨는 “농사꾼은 착실히 농사만 지어야 한다”고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이내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신문도 꼭 같이 읽으며 안 읽는 척 하며 자신의 책을 가져다가 읽은 흔적을 남긴다고 남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1남2녀인 자식들도 장성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농번기에는 시키지 않아도 군말 없이 꼭 농사일을 도와준다고 한다. 특히 큰딸은 고등학교때부터 농부에게 시집간다고 하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다가 만난 청년농부와 결혼해 전북 정읍에서 대규모 벼농사와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하며 농부로 살고 있다. 착실한 농부로 살면서 힘겨움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봐왔기 때문이 아닐지…

김기숙씨는 지금도 가난해서 못 배운 한을 얘기할라치면 눈물부터 쏟아진다. 교복 입은 친구들이 부러워 지나갈 때까지 등 돌리고 밭에서 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하지만 김기숙씨의 글쓰기와 봉사활동이 계속되는 한 그 어떤 가방끈보다도 길게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이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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