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 박효정 씨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청년귀농자를 위한 안내서

▲ 박효정 씨가 약초밭에서 땅두릅을 재배하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개인의 욕심을 경계하며 건강한 먹거리를
누구보다 고민해야 하는 직업이 농부…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중 이번 호에는 박효정 씨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청년귀농자를 위한 안내서’를 싣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어쩌면 도시에서는 이미 꺾인 나이, 촌에서는 막내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존재로 보여지니 살맛 난다. 청춘의 8할을 농심으로 채웠다. 아파트에서 20년을 살았던 나는 도시라는 시공간을 탈주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그래, 다시 도시에서는 못 살 것 같다’ 누구보다 가장 진솔하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의 지나온 시간일 테다.

한 젊은 여자 농부가 버텨온 10여 년 간의 귀농이야기. 이것이 유일한 나의 자산이다. ‘왜 농촌입니까?’하며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를….
수능을 마치고 이화여자대학 입학을 앞둔 방학에 1종 면허증을 취득했다. 언젠가 트럭 야채 장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뜬금없는 예감이 들었던 걸 보면 내게 귀농은 어쩐지 예정되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대학이라는 공간 안팎에서 마주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 자본주의에서 오는 비인간적인 부조리에 저항하며 나의 청춘을 불태웠다.

비정규직 철폐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노숙 현장, 여성의 인권, 퀴어 퍼레이드 등 삶의 의지가 절실한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더불어 치열하게 나의 생존도 쟁취해야 했다. 고민의 끝에서 이 사회의 대안은 교육 현장인가 싶었다. 아이들을 만나는 공부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도시라는 시스템에서는 아이들에게 내가 보여줄 모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멀리 보았던 귀농이 눈앞에 다가왔다. 내 삶의 결을 가다듬고, 자본과 도시로부터 독립적인 유니크한 장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과 나의 정체성의 키워드를 모아 ‘비혼여성생태공동체’를 준비했다.

모임이름은 ‘정착과 유목 사이’, 온라인에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오프라인에서는 20명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뜻이 같아서인지 분위기는 다정하면서도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나이도 성격도 제멋대로였다. 우리를 연결시켜준 하늘과 바람에게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준비한다고 모였고, 실제로 세미나와 도보여행, 자전거여행, 채식빵 만들기 등 여러가지 일을 2~3년간 도모했지만 섣불리 공동체를 결성하지 않았다. 각 개인의 삶을 우선적으로 지지했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서로의 상황을 지켜보며 자기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우리의 모임은 친목 위주의 성격이 강해졌고, 지금은 곳곳에 흩어졌다.

우주의 기운이 뻗어서 가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정착과 유목 사이. ‘그래, 우선 만나야 한다. 그리고 어디로든 가야 한다’ 일의 시작은 그랬다.
나의 첫 정착지는 전북 임실이었다. 그것도 25살 한 해의 끝날, 12월31일 이주했다. 겨울이라는 무리수가 있었지만, 농한기에 먼저 짐을 풀고 봄을 맞이할 심산이었다. 동거인은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지 탐방에서 2박 3일 만났던 엄마와 동갑 ‘산야시’. 우리의 인연만큼 가벼운 짐을 풀고 함께 일상을 시작했다.

그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고, 난 산야시가 살아온 파란만장 이야기를 들으며 추위를 견뎠다. 머리를 바짝 밀고 있던 나를 있는 그대도 보아준 산야시와의 만남은 선물이었다. 산야시가 봄나물을 캐러 가면 난 전을 부쳐 참이랍시고 들고 찾아갔고, 한 방에서 먹고자며 2달을 보냈다. 그러나 기거하던 공간의 소유권과 이용에 문제가 생기고, 서울에서 함께 살던 띠동갑 친구의 지인 소개로 전북 무주 골짜기에서 봄을 맞게 되었다. 농사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그때는 농사짓기보다 촌에서 살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엌 귀퉁이가 살포시 내려앉은 40여 년은 지난 옛날 집, 구들을 때도 살짝 따뜻해지고마는 방에서 도시의 때를 벗어내기에 바빴다. 작은 통과 버려진 후라이팬, 재를 이용해 생태화장실을 만들고, 콩기름 먹인 장판 깔고 벽지 붙이고, 오색 페인트 발라 딱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산으로 올라가 고사리도 꺾고, 집 앞에 20~30여평 정도의 텃밭에서 나오는 싱싱한 채소들이 밥상에 가득했다. 소식과 채식을 좋아하던 터라 부족함을 몰랐다. 냉장고도 없어 김치는 종종 시어 빠졌지만, 신김치는 김치전으로 부활하여 막걸리를 불렀다.

친구가 뒷산에서 따온 버섯으로 된장국을 끓였다가 식중독에 걸려 한나절을 고생하다 아랫집 한의사의 쑥뜸으로 살아났고, 집 뒤 대밭에서 흔들리던 바람소리를 들으며 툇마루에 누워있으면 가슴이 트였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며 우리는 세계의 시골 마을과 생태공동체 기행을 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질문의 시작은 난방이 잘 안되는 시골에서 추위를 어떻게 보내냐는 고민이었지만, 답이라기보단 그냥 로망인 여행이었다. 딸린 식구가 없으니 떠나기도 쉬었다.

머물 곳도 루트도 딱히 정하지 않고 바람처럼 골목을 쏘다녔다. 용기, 뜻이 순수하면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일주도 좋겠다 하고 떠났으나 중국과 태국, 라오스, 인도, 네팔 등을 지나 돌아왔다. 여러 마을들과 공동체를 접하면서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가 계속 비춰봤다. 아름답고, 혁신적인 생태공동체도 있었지만, 나의 몸이 태어나고 언어의 탯줄을 잡은 한국에서 만들어 보자, 전통을 이어 지역의 정서를 풍기는 커뮤니티가 나에게 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먹어 온 음식의 중요성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먹은 쌀의 찰기, 된장-간장-고추장, 김치 맛의 풍미와 그것을 위한 농사. 한 해에 한번씩, 앞으로 잘하면 40번 해볼 수 있는 농사.

나는 다시 서울로 갔다. 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해보았다. 자전거 여행, 도시텃밭공동체 등 도시에는 아이디어와 사람들이 넘쳤다. 어느 관계에 접속하면 끈을 잡기도 하고, 또 다른 프로젝트가 이어졌던 거 같다. 실컷 놀고 나서 충남 홍성 풀무학교 전공부를 두드렸다.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귀농인들과 연결되면서, 비슷한 뜻을 품고 마을살이가 가능하다는 것, 어렵지만 가치있는 일일 뿐더러 재미가 남다름을 맛 볼 수 있었다.

장구재비와 노동요를 불러가며 손모내기를 해보고, 나란히 서서 김매어 나갈 때의 끈끈함, 비닐하우스 짓기, 경운기, 트랙터 몰기 등 하나하나 시골살이에 필요한 기술과 즐거움을 배웠다. 무엇보다 눈빛만 봐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선생님들과 하나하나 개성이 강한 동기들과의 더부살이가 밑거름이 되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격을 갈고 닦기 위해 경북 문경 정토수련원 ‘100일출가’ 생활을 시작했다. 공동체 생활에 농사, 집짓기, 밥짓기 등의 수행 프로그램이 있어 기꺼운 마음이었다.

내가 잘 쓰이기 위해서, 나를 내려놓는 과정. 3일에 걸친 1만배를 간신히 하며, 리셋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그냥 ‘예’하고 합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상처가 부모님을 향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스스로를 용서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이 스르르 올라왔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다. 쓸고 닦고, 내가 사는 터와 내 마음 구석 청소를 매일 매일 하는 습관의 중요성을 배웠다.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것들의 공덕’을 생각하는 세끼 밥 앞에서의 기도, 기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훌륭한 도반이었던, 내 자식의 아비가 될 사람을 만났다. 100일간의 수행자 생활을 마치고, 이제 진짜 일상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보자 다짐하고 문경을 나서 간 곳은 제주도였다. 홍성 풀무학교를 중퇴한 큰 이유였던 반농반어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내적인 힘도 가득했다. 100일 출가에서 만난 친구와 서울 ‘빈집’에서 알게 된 친구, 이렇게 여자 셋이서 바당과 밭을 오가며 살아가자고 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이후 무주에서 함께 살던 친구도 결합하며 넷이 되었다가 한 친구가 떠나면서 또 셋이 되었다.) 가방 하나 달랑 매고내려간 제주도에서 통장에 남은 돈 80만 원과 친구의 돈을 합해 집 1년 세를 내고 자리를 잡았다.

통장 잔고 0원, 가볍고 추웠다. 일단 생활비를 벌고자 근처 양식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친구의 친구 소개로 한살림 생산자 강순희 언니와 연결되면서 우리의 제주도 농사는 시작되었다. 여기서, 친구의 친구는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가느다란 끈도 절실했다. 우리는 추운 겨울에 한 방에서 셋이 살다가, ‘자기만의 방’을 찾아 각 방에 둥지를 틀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을 바꾸는 날을 정해, 한집 안에서 이사를 했다. 우리의 개성대로 각 방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띠었고, 끼니도 한 명씩 돌아가면서 했다. 성격대로 맛과 밥상 디자인이 달랐다. 눈 떠서 쭉 함께 일하고 놀고 먹으며, 일이 삶의 낙(樂)이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보낸 2년을 돌아보면 어떤 수년의 시간을 압축한 것 같이 진하게 느껴진다. 내 생애 첫, 바다의 시간이 펼쳐졌다.

먼저 해녀학교를 다니며 가볍게 경험을 쌓다가, 동네 삼춘들(제주도에서 남자, 여자 어른을 부를 때) 틈에 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바다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숨을 참고 들어가서 2분간 성게와 소라를 잡고, 미역을 따고 보말을 잡았다. 물질을 해서 돈을 벌 순 없었지만,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는 사치를 누렸다. 처음엔 파도의 물결이 몸에 남아 뭍에 나와서도 한동안 몸이 출렁였다. 바다는 목숨 걸고 들어갔지만, 의외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여서 더욱 그랬다. 2000평 가량의 밭을 빌어 기계의 힘 없이 여자 셋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녹두와 팥, 콩, 깨, 마늘, 고구마, 감자 등을 지어 팔았다. 자전거에 포대를 묶고, 괭이를 싣고 바람 잦은 섬 곳곳을 다녔다. 밭에서 일하다 탕탕물에 가서 물놀이를 하고, 바다에 풍덩 들어가 열을 식히고 까맣게 익어갔다.

우리는 제주도에서 히치하이커였다. 땅도 집도 빌었고, 이동할 때도 손을 흔들어 태워주는 차를 애용했다. 히치하이킹의 처음과 끝이었던 인연은 여성농민회 언니들, 그녀들과 토종씨앗을 찾아다니고 풍물을 배우며 농악을 익혔다. 나를 바다로 인도했던 건 ‘리틀 포레스트’를 쓴 작가의 ‘해수의 아이’라는 만화책. 바다의 마력에 대한 이야기가 내 삶에도 이어졌다. 부딪히면 상상을 넘어선 현실을 만난다.

그리고 내가 진짜 바라던 바가 뭐였는지 알게 된다. 산과 바다가 둘 다 좋아서 꿈꾸었던 반농반어의 삶과 친구들, 나는 이 환상적인 조합과 굴레가 주는 안정감에서 일탈을 느꼈다. 이렇게 평생 살아도 좋겠다 싶었고, 농사는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만 서른까지 가능한 워킹 홀리데이를 거쳐 프랑스나 독일에서 농촌을 겪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겨울 동안에 한옥학교를 다니며 집 짓는 일도 전문적으로 배워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나는 꽤 갑작스럽게 제주를 뜨게 되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잡지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경기도 파주 한옥학교에서 매일 날을 갈고, 대패질을 하며 보냈다. 내 몸통보다 굵은 소나무를 안고 먹선을 튕기고 끌질과 대패질을 하며 땀 흘려 추위를 이겼다.

촌에서 살다보면, 집 짓는 일이나 수리하는 기술이 필수였다. 언젠가 내 피땀 어린 집 한 채를 뚝딱 만들 계획에 콩닥거리며 몰입해서 배우고 또 대패질했다.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어느 나라로 갈까 고민을 하는 시기, 하늘에선 나에게 그토록 바라던 아기를 점지 해주셨다. 저 멀리 날아가려고 한 순간, 정착의 길이 펼쳐졌다. 내 인생의 지진.

나는 인간 관계를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는 것에 반대했는데, 나의 반대되는 행동에 어떤 이는 유연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연락을 끊었다. ‘그래, 이게 나였다’ 한 번 해보니, 결혼과 육아는 정착이 무엇인지 달리 알려주었다. 수년 전에 출산하는 꿈을 꾸면서 실제로 아이를 낳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뼈마디가 열리고 아프다 못해 우주 멀리까지 고통이 뻥~ 터지는 무한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2개였던 10달간의 잉태, 내 안의 나 아닌 나를 기를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다. 그 어느때보다 자궁과 유방을 가진 존재여서 다행이었던 시간, 먹고 자고 싸는 집에서 두 아이를 받았다. 조산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한 아이는 목에 탯줄을 칭칭 감은 채로, 한 아이는 하늘을 보며 얼굴이 나왔다. 그 아이들의 태반은 각기 집 근처 의미 있는 나무 아래 고이 묻었다.

아이를 기르기에는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제 할아버지가 나온 초등학교가 집 뒤에 있다. 한 핏줄을 길러온 터가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제 뿌리를 찾는데 방황할 시간을 줄일 것이다. 자식을 거울 삼아 나를 돌아보며, 약초를 농사 짓고 채취하며 산다. 산에 가까운 삶. 나이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과정들, 돌아보면 고생했던 기억은 흩어지고 알맹이만 남아 나를, 나의 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여전히 시행착오는 많이 하고 있다. 훈련 삼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이제는 집을 짓고, 산에 깃들어 살며 농촌의 신선한 마을모델을 그려보고 싶다. 예로부터 농촌은 문화의 근원지다. 나는 지난 과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경남 거창에서 시어른들과 함께 살며 나의 미래를 내다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후세대들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젠 경자유전, 농촌에서 몸을 부지런히 놀리니 내가 기댈 수 있는 땅을 얻게 되었다. 귀농한지는 더 되지만, 농업경영체로 등록하고 농지원부가 생긴 것은 3년 차다. 아버님이 농사지으시는 땅까지 총 1만평 가량의 밭에서 나온 약초들이 손을 거쳐 간다. 약이라는 ‘치료하다, 즐겁게 하는 풀’이란 뜻이 우리네 삶과 얼추 닮아있는 것 같다. 친환경인증과 GAP를 받고, 영농일지를 블로그와 SNS에 틈틈이 올리며 약초의 가치를 쉽게 전하고자 한다.

해발 1000m가 넘은 산들에 둘러 쌓여있어 철마다 나오는 30여 가지의 약초를 채취하고 손질하며, 자소엽, 독활, 탱자, 우슬 등을 재배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이로운 풀과 열매가 많다니 놀라운 일이다.
알면 알수록 자연과 나의 밀접한 연결과 신비로운 생명의 흐름에 감탄하게 되는 농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개인의 욕심을 경계하며 건강한 먹거리를 누구보다 고민해야 하는 직업이 농부인 것 같다. 자신이 길러온 씨앗을 제 목숨처럼 지켜온 선조의 농심을 따라 청년 농부들도 깨어 연대하고 농사짓는 자부심을 전파하면 좋을 일이다.

■ 현장 인터뷰

▲ 박효정 씨(사진 오른쪽)와 남편 이진우 씨가 아들을 안은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꿈 많은 소녀, 농부가 된 까닭은?

서울에서 제주까지…삶의 의미 찾는 여정
결혼 후 ‘정착’의 소중함 배워가는 중

나이 34살, 도시에서 청춘이란 타이틀을 얻기엔 조금 많은 나이다. 그러나 고령화로 접어든 농촌에서 34살은 ‘청춘’이란 단어를 붙이기에도 한참 어리며, 도전도 막힘없이 해낼 수 있는 나이다. 박효정 씨의 ‘은하수를 건너는 청년귀농자를 위한 안내서’를 읽다보면 도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일대에서 약초 농사를 짓는 박효정 씨는 띠동갑 나이 차부터 30살 나이 차까지 두루두루 친구로 지낼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상대방이 거리를 두고 어렵게 대했다면 박효정 씨 또한 어려움을 느꼈겠지만 그의 주변인물들은 모두 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청년귀농자를 위한 안내서’, 어쩌면 거창한 제목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들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제가 사실 예전에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SF책을 읽었어요. 그 책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이야기 속에 담긴 히치하이커와 내 삶이 비슷하기도 하고, 청년귀농자들과도 조금 비슷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내용이거든요.”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를 나온 박효정 씨는 장애나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에 무척 관심이 많다. 직접 영상활동가로 일하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전달하는데 큰 매력을 느꼈다고. 그는 단순히 칠판 앞에 앉아 필기를 하는 것에서 배움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 현장에서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이야기를 찾은 것이다.

그 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삶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싶어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도시가 아닌 직접적인 터전을 꾸려나가는 것에서 더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25살, 어린 나이에 귀농에 대한 꿈을 안고 전북 임실로 향했다. 이주를 하는데도 전혀 무서움이 없었다고 한다.

귀농의 시작, 전북 임실로 향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어요. 그래서인지 내려가서 살고, 부모님 품을 떠나고 이런 두려움보단 설렘이 더 가득했어요. 단순히 말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죠.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막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 그 막연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나 임실에 내려오기 전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았던 박효정 씨는 귀농운동본부에서 산야시를 만나 임실로 내려왔다. 3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둘은 임실에서 자급자족하기 위해 먹을 것을 키우고 가꿨다. 작물을 팔아 돈을 벌기 보단 돈 없이도 편안히 살 수 있는 꿈을 이뤄간 것이다.

“산야시 씨를 외국사람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산야시’는 산스크리트어로 방랑 생활을 하는 수행자를 뜻하는 일종의 닉네임이에요. 제 엄마랑 동갑이었는데 분위기도 편하고 저를 많이 생각해 줬어요. 저도 산야시가 아니었다면 어렵고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을 텐데 산야시라서 나이차에 대해 고민을 안 한 것 같아요.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어요.”
먹는 것도 힘들고, 겨울이 와 사는 곳도 변변찮아 너무 고민이 많았지만 효정 씨는 줄곧 살아오던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서울이 아닌 다시 살아볼 시골을 꿈꿨고, 그렇게 무주로 향했다. 무주에서 함께 살던 친구가 따온 버섯으로 된장찌개를 끓여먹다 식중독에 걸려도 시골이 좋았다. 효정 씨는 총 8번 동안 거처를 옮겼지만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을 뿐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땅을 사고, 매매를 하면 정착을 하게 되는데 저와 무주에서 지내던 친구들은 얻어 살거나 빌어 살어서 정착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갖고 각자에게 맞는 땅을 찾아간 거죠. 그곳이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기도 하고요.”
시골에 연고가 없어 사는 곳을 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인연이 생겼고, 그 인연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까지 마련해줬다.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터를 찾아가던 중 더 큰 공동체에 대해 배우고자 그는 홀연히 해외로 떠날 채비를 했다.

생태공동체 배우기 위해 해외로 떠나
해외는 확실히 국내보다 자유롭고 열린 공동체가 많았다. 꼭 농사에만 국한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자연을 즐기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효정 씨는 한국 음식이 그립다는 간단한 이유로 여행 3개월 차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 입학해 손모내기 법 등 농사에 관련된 세세한 것을 배웠고, 전부터 꿈꿔오던 제주도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정토 수련원 100일 출가에 참여해 마음을 다졌다.

“제주도로 가고 싶다는 꿈이 생기고 육지를 떠나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정토 수련원에 들어갔어요. 100일 동안 수행하면서 생각하고, 차분해지는 걸 몸에 익히고 싶었거든요. 제가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불교에 무소유라는 게 있듯이 그 틀 안에서 지내면 제가 더 안정적일 것 같았어요. 그곳에서 정말 내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볼 수 있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정토수련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난 박효정 씨는 남편을 만난 그날의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남편이 4살 연하였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정말 좋은 친구였다”며 그는 4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반농반어의 꿈 실현시켜
남편과의 만남을 뒤로 한 채 제주도로 떠난 그는 정토수련원과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물질도 하고 농사하고, 안 해본 것들이 없다. 농사도 기계가 아닌 직접 손으로 했기에 더 애착이 갔다고 한다. 꿈 꿔 왔던 일이라 그랬을까. 박효정 씨는 작은 방에 살고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제주도 생활을 이어오던 중 워킹홀리데이(여행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비를 충당해 젊은이들의 자립성을 길러주는 입구사증 제도)라는 또 다른 꿈이 생긴 박효정 씨는 꿈을 위해 한 발자국 달려가는 도중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됐고, 둘 사이에 예쁜 생명을 갖게 됐다. 꿈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달려가는 그였기에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법 하지만 그는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혼을 하면 정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어요. 결혼이 정착이란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결혼하고 같이 여행갈 수도 있고…, 정착은 결혼보단 농사라고 할 수 있죠. 저희도 여기와서 땅을 샀고 계속 살아오고 있으니까요. 워킹홀리데이를 포기했다는 생각도 없어요. 가면 물론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까 너무 좋았겠죠. 하지만 아이를 낳는 출산의 경험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전 다시 돌아가도 아이들을 선택할 것 같아요.”

정착, 누구는 안정감을 느끼고 누구는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박효정 씨는 지루함이 아닌 그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배워가고 있다.
“시부모님이 계속 살아오신 모습을 보고 정착의 좋은 점에 대해 배워가는 중인 것 같아요. 전에는 정착과 유목 사이에 살았지만 지금은 한 땅에 지내면서 사람에게 중요한 안정감을 느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젠 꿈도 정착과 가까워졌어요. 정원까진 아니어도 작은 숲을 가꾸고 약초도 여기저기 뿌려놓고 야생의 기운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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