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 김경숙 씨의 반쪽만으로 완성시킨 여섯손가락

▲ 어머니의 안타까운 일생을 담담히 그려낸 김경숙 씨.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우수작 중 이번 호에는 김경숙 씨의 ‘반쪽만으로 완성시킨 여섯손가락’을 싣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보다
앞서 다가오는 차가운 현실,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들
이 모두가 그녀에겐
고통이지 않았을까?

얼마 전 아들과 배드민턴을 치던 중 공에 맞아 한쪽 눈이 안보여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실려 갔었다. 검사를 이것 저것 해보시더니 아들이 공격한 공이 얼마나 강했던지 눈을 감긴 했지만 각막 안쪽의 그 깊은 곳에 출혈이 생겨서 입원까지 했다. ‘절대 안정’을 취하고 걷는 것도 안 된다 하시며 직접 휠체어까지 태워 주는 고급시중을 받고서야 시력을 되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봤자 이틀. 겨우 이틀을 안보였는데도 너무나 불편하고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울 엄니는 팔십 평생을 반쪽세상만을 보고 사셨구나’ 생각하니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안타까움이…

울 엄니는 유아기에 홍역을 앓았었는데 고열이 내리지 않았고, 때마침 외할머님은 외증조할머님의 제사를 모시고 내려오시는 길이셨고, 이미 열꽃이 핀 아기를 발견했을 때는 저녁때였다. 시골이라 병원에 갈 교통편이 없었던 터라 아픈 아기를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셨단다. 그렇게 하룻밤을 넘겼는데 시간이 지나 열은 내렸지만 엄마의 한쪽 눈은 다시 찾을 수가 없으셨단다. 그날 이후 엄마는 여든이 넘은 이날까지도 한쪽 눈은 항상 감겨있었고, 알게 모르게 늘 창피해 하셨던 거 같다. 지금은 홍역예방접종을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바로바로 하고 정부에서도 해 주지만 그때는 나라에서 그럴 여유도 없었다. 서민들은 쌀밥은 구경하기도 힘들고 보리밥, 조밥, 수수밥 먹기도 힘든 때였으니 지금 현대인의 밥상을 보면 참 재미난 구석이 많다.

그때 흔하게 먹던 잡곡들이 대우 받으며 비싼 몸값을 자랑하고 쌀이 천대를 받고 있으니 울 엄니 말씀대로 사람은 오래살고 볼 일이던가.
지난 여름 대전에서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실내 예식홀인데도 엄니는 내가 사준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다. 그걸 보면 당신이 그간 얼마나 감은 한 쪽 눈을 의식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바빠서 그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는 엄마 말은 진실 반, 거짓 반이셨다.

어린 소녀가 한창 멋도 부리고 사랑도 알아갈 나이에 차라리 시력만 잃은 거였다면 그리 힘들진 않았겠지. 겉으로 봐선 시력 안 좋은 건 알 수 없으니….
외가는 그리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밥은 굶지 않았었고, 선을 안보고도 데려간다는 딸부자집의 셋째 딸이었다. 하지만 장애를 이유로 가난한 집안의 아버지와 혼인을 하셨고, 우리 6남매를 낳으셨다.

물론 그 시절 다 그랬다지만 신혼 때 아버지는 군 입대를 하셔야 했고, 울 엄니는 시어머니와 아이들을 돌봐야만 했다. 논 한 떼기도 없어 남의 집 품팔이를 해가며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야 했다.
얼마나 암담하셨을까? 그래도 아버지는 제대 후 누구보다 열심히 우리 6남매를 위해 일하셨다. 그렇지만 경작할 논도, 밭도 없는 하루 품팔이 가장에겐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고, 그 이상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일자리도 임금도 박했던 그날엔.

내가 태어나기 얼마 전 드디어 엄니와 아버지의 꿈이 이뤄졌다. 그날 두 분은 당신 소유의 땅문서를 들고 후들거리는 두 발로 논두렁을 돌고 돌도 또 도셨단다. 너무 좋아서 다리 저리는 것도 모른 체….
얼마나 좋으셨을까? 하루하루 저린 손발 주물러 가며 모았을 그 돈으로, 백원, 이백원 모아가며 먹고픈거 못 드시고, 다만 자식들 입에 겨우 한입 넣어줄 뿐 당신들 입에는 넣지도 못하고 모은 그 아픈 돈으로 이뤄낸 그 전답인 것을….

부모님에게 너무도 쉽게, 당연한 일인 듯 재산을 물려 받아온 사람들에겐 의아한 이야기겠지만 유복자로 자라온 울 아버지에겐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이셨을까? 장애를 가졌다는 그 이유로 열등감에 늘 고개 숙여 살아야 했던 엄마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에 찬 기쁨의 눈물을 쏟으셨을까?
세계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온라인 오프라인 시대에 그만큼 직업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왜 실업자는 자꾸 늘어만 가는지 좀 아이러니하다. 그때 그 시절엔 먹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몸도 입도 사치를 부리느라 힘든 일이라며 3D업종이니 뭐니 하며 기피하고, 대졸실업자들은 하나같이 방구석에 처박혀 캥거루족 흉내를 낸다. 한심할 노릇이다.
울 아버지가 지금 이런 젊은이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차시겠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엄마 곁에 오래오래 바람막이가 되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마흔네 살 딱 지금 내 나이에 어린 자식들만 두고 홀로 하늘나라로 도망치듯 서둘러 가버리셨다. 허망하게.

뭐가 그리 바쁘셨을까. 치매 걸린 할머니도 두고서 먼저 떠나셨으니 울 아버지는 불효자 중 가장 으뜸이셨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 장례식이 뭔지 죽음이 뭔지 알게 뭔가. 그저 멍하니 어른들만 지켜볼 뿐 넋 놓고 목 놓아 우시는 엄니를 보며 나도 모르는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졌을 뿐….
그리 어린 나를 보며 엄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버지 없는 차가운 현실 앞에 놓인 당신의 인생길이 진흙 속을 질척거리는 어린아이의 늘어진 옷자락 같았던 그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보다 앞서 다가오는 시리도록 차가운 현실.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어린 자식들. 이 모두가 그녀에겐 고통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약하지만 강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가장이 돼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란 존재 할 수 없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아빠가 남기고 간 전답으로는 여덟 식구 입을 막을 수는 없으니 뭐든 해야만 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고, 가마쟁이가 옹기를 구워 팔고 있었다. 엄니는 그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지고 반나절을 걸어 겨우겨우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팔면 그 수익 중 아주 조금 떼어내서는 간단히 요기를 해결하셨는데, 그렇지 못한 날에는 종일 발품만 팔고 쫄쫄 굶고 쓰러질 듯 걸어 들어오셨다.

어느 날엔 주린 배를 잡고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적도 있으셨다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기다리던 엄마를 보며 밥 달라고 보챘다. 당신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어린 자식들에게 아프다 말 한마디 못하고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시래기를 삶아주셨다. 모두 놔 버리고 쉬고 싶으셨을 거 같다. 나라면 말이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겠다. 자식이 뭐라고….
맛이 없으면 버려버리는 지금의 우리가 그날 배고팠던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요즘 아이들은 배고픔이 뭔지 알기나 알까? 잃어버려도 찾으려 하기 보단 새로 사는 걸 택하는 아이들. 사고 싶으면 주저 없이 살 수 있고, 버리고 싶음 망설임 없이 버려버리는 아이들에게 한 끼 식사의 감사함을 어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날엔 무덤가에 주저앉아 슬피 우시는 엄니를 봤다. 40대. 겉으로 강한 척 흉내 내던 가녀리고 여린 여인이 거기서 살아갈 이유를 찾고 계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걸어 내려오셨다. 그날 엄니는 삶의 이유를 찾으셨을까?

옹기만 팔아서는 여덟 식구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옹기뿐 아니라 옷 보따리 장사도 하셨다. 옷 보따리 또한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이집 저집 돌며 쫓겨나기도 수십 번. 어렴풋이 떠오르는 엄마와 보따리.
지금보다 젊긴 했지만 종일 종종걸음으로 이고 지고 다니며 사람 상대하는 일은 몸 뿐 아니라 맘도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들 버리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셨을 거야. 그렇게 힘들게 옷 몇 개를 팔고 돌아오면 구물구물 아이들이 처량하게 쳐다본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촘촘한 그물망처럼. 아이들 눈망울이 말해준다. 우리는 엄마 뿐 없다고 엄마뿐이라고….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버티신 결과 널찍한 논도 샀고, 연날리기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은 밭도 샀고, 그리고 우리 육남매도 건강하게 잘 키우셨다.
그리고는 하나 둘 제짝을 찾아서 떠나가 버렸고, 이제는 다 늙은 엄마 혼자 덩그러니 커다란 집에 홀로 남겨졌다. 그래서 일까? 그간 먹일 생각 입힐 생각하느라 정신 줄 놓을 새 없었던 엄니는 그만 그 줄을 잠시 내려 놓으셨다. 팔십을 넘어가는 시점에.

우리 마을엔 농한기가 오면 모두 마을 회관에 모여 같이 밥도 해 드시고 심심풀이 삼아 민화투라는 십 원, 오십 원짜리 동전이 오가는 동양화 놀이를 하며 쉬시는데 어느 날에는 갑자기 엄마가 “왜 나만 밥을 안주냐? ×××야~ 이 ×××들아~~~” 욕을, 악을 악을 써 대며 하시는데, 전에 없던 모습이라 동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모두 놀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셨단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전화하셔서 알려주셨다.

치매 증상이셨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럽고 안타깝고, 왠지 서글퍼졌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이 먹여야 할 아이들이 없어져서일까? 장성한 자녀들 바라보며 이제 쉬고 싶으셨을까? 병원진단결과 치매가 맞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약물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완치는 안 되지만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홀로 사시는 엄마를 혼자 둬도 되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이도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리고 찬찬히 지켜보니 엄마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밝아지셨다. 확실히 더 행복해 보이신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내려와라”라고 하며 당신의 의사표현을 거침없이 하신다.

그전 같으면 “차 막히니깐 내려오지 마라. 나는 괜찮다.”며 늘 자식들 입장을 먼저 살피고 당신 서운한 것은 전혀 표현 안 하시던 전형적인 한국여성이셨다. 그런데 하고픈 말 다 해버리는 현대 신여성으로 바뀌셨다. 귀여워지셨고 더불어 많이 웃어서 인지 예뻐지셨다. 어찌 보면 좋아 보인다. 속에 담아둘 말이 없어져서 일까?

비오는 저녁, 엄마는 오라고 전화도 하셨다. 전에는 빗길 운전 잘 못하는 나를 생각하며 “비오니깐 오지 말고 내일 와라”하셨을 테지만(운전은 하지만 야간운전, 특히 비오는 날에 야간운전은 쥐약이다) 좋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프다.
내게 뭘 건네주신다. 2만원. 무슨 돈이냐고 물어보니 며칠 전에 내게서 빌려가셨단다. 나는 웃는다. 엄마보다 더 정신없는 나를 보며 엄마의 기억력이 나보다 좋은 게 좋아서 그냥 웃는다.

“너는 아직 젊은 것이 그렇게 정신이 없냐?”며 핀잔주시는 엄마.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엄마가 고맙고 슬프다. 고단했던 당신의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모두 내려놓고 쉬고 싶으셨을까? 힘든 기억들도 지우고, 털어내 버리고,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훨훨~.
아버지는 종종 버스를 몇 번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약을 타러 다녀오시곤 하셨다. 그날도 약을 타러 도시로 나가는 길이셨다. 내 손을 잡으시고서. 그때 내 나이 다섯 살. 처음으로 버스를 타는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멀미 때문에 아침 먹은걸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화가 난 버스기사는 내게 버럭버럭 화를 냈고, 나는 겁먹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그 기사보다 더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아파서 소리 지를 기운도 없으셨던 분이 그날은 버스가 폭발할 정도로 기사에게 소리소리를 지르셨다. 그때 이미 위에 붙어있던 암덩어리가 다른 장기로 번져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진통제로 버티던 위암말기였던 것 같다. 깡마른 아버지가 화내시던 모습이 내 기억속 희미한 모습으로 한 토막 남아있는 걸 보니…. 그날이 오늘이었더라면 아버지가 조금만 늦게 태어나셔서 지금 아프셨더라면….

넘어질듯 가까스로 딸아이 손을 잡고서 버스에 올라타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 희망 없는 남편의 병을 바라보며 영혼 없는 손을 흔드신다. 그날의 쓸쓸한 엄마의 표정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런 엄마에게 유난히 더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거친 농부의 아내가 되어 돌아온 셋째딸. 도시로 시집보낸 딸이 아픈 손가락이 되어 돌아온 이유도 참 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언니의 시숙님의 갑작스런 농경기 사고로 인해 귀농을 결심한 것이다. 울 형부는 잘나가는 도시남자, 인테리어전문가셨다. 그런데 사장님 명함을 버리고 소들의 아빠가 되셨다. 형부야 전부터 귀농의 꿈을 조금이나마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소들의 엄마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하고 넘치는 시골인심에 맘고생 좀 하셨더란다. 담장도 대문도 없는 시골집에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동네아짐들, 친지들. 이집 저집 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 꿰고 있는 너무 넘치는 인심(?) 덕분에 적응 못하고 눈물바가지 쏟아부었더라지.

어느 날엔 마루에 걸터앉아 고추 꼬투리를 따는데 어느 집 소가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기에 집집이 돌아다니며 누구집 소가 나왔다며 알려주고 다녔단다. 그렇게 동네를 다 돌아도 빈 외양간을 못 찾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언니집 외양간에 소가 한 마리 비었더라지 참…. ‘소마저도 지 주인을 얕잡아보고 그런다’며 웃었다.

이제는 웃는다.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 불편한 시월드 사이에서 이래저래 적응 못하고 맘고생 하는 셋째 딸을 보며 안타깝고 안쓰러워 더딘 손이라도 한손 보태준다며 엄마는 또 인공관절수술한 다리를 끌고 버스를 타고 걸어 젊은 시절 옹기를 팔며 걸었던 그 길을 다시 또 걸어가신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 현장인터뷰 - 영광에 울려 퍼지는 김경숙 씨의 사모곡(思母曲)

“주춧돌같은 어머니…어떤 위로보다 큰 힘”

“딴 집 아그들처럼 못 믹이고 못 입혔어도
 우리 애들이 겁나게 다 착해서 살았제. 아따~
 속 썩이고 그래블믄 살았것소. 진작 죽어부렀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선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사랑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신보다 자식을 더 생각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어머니의 자식도 나이가 들어가면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깊은 정을 알 것만 같습니다
… (중략) …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없어
늘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시인 용혜원의 ‘늘 간절한 어머니 생각’ 중에서>

▲ 사진 오른쪽부터 김경숙 씨, 모친 임오순 여사, 경숙 씨 언니 순옥 씨.

어머니의 끊임없는 큰 사랑, 이제야 알게 된 어머니의 깊은 정,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전남 영광군 영광읍 김경숙 당선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용혜원 시인의 ‘늘 간절한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것처럼 44살에 홀로되어 6남매를 억척스레 키운 김경숙 씨의 어머니 임오순 여사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현재 영광읍내 안경원에서 안경사로 일하면서 어머니의 안경을 도맡아서 담당하고 있는 김경숙 씨는 결혼 후 서울에 살다가 13년 전 다시 영광으로 귀향을 했다고 한다.
“지금 제 나이쯤 엄마가 혼자가 되신 거에요. 같은 여자의 일생으로 봤을 때 불쌍하시잖아요. 한쪽 눈도 불편하신데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라면 절대 못했을 거에요.” 6남매 중 막내인 김경숙 씨는 음료수를 마신 어머니의 입가를 다정히 닦아 주며 말했다.

“딴 집 아그들처럼 못 믹이고 못 입혔어도 우리 애들이 겁나게 다 착해서 살았제. 아따~ 속 썩이고 그래블믄 살았것소. 진작 죽어부렀제~” 구수한 사투리로 어머니의 답가(?)가 이어졌다.
그 옛날은 막막한 생계로 농사일이다 장사다 엉덩이 편히 붙일 날 없었지만 지금은 1남5녀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동네에서 제일 부러운 어르신이 됐다. 큰딸, 셋째 딸, 막내딸이 영광에 살면서 수시로 드나들고, 타지에 있는 자식들도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해 어머니의 안부를 꼭 확인한단다.
“우리 자슥들맹키로 효자·효녀가 없당께. 다덜 부러워 죽을라 헌당께. 나가 겁나 복이 많긴 많은갑써”
그 고생한 기억은 금세 잊고, 장성해 각자 가정을 잘 이루고 사는 자식들이 어머니는 그저 자랑스럽고 대견하기만 한 듯하다.

고된 농사일, 내 자식만큼은 안했으면…
사실 어머니는 시골에서 너무 고달팠기에 자식들만큼은 도시에서 살기 바라셨단다.
“우리 친정엄니가 날 시골에 시집 보내 불고 겁나게 힘들게 사는 모습 보며 죽어도 눈 못 감고 간다고 그랬당께. 그란디 내 딸자슥이 뜬금업시 어려운 농사일을 헌다고 혀가꼬 얼매나 속상혔는지 모른당께~”

시댁의 뜻밖의 사고로 1998년에 영광군 홍농읍 상하리로 귀농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셋째 딸 김순옥 씨 얘기다. 동생의 글을 읽기 전까지 자신이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는지 몰랐다는 김순옥 씨는 현재 영광군 홍농읍생활개선회 부회장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김경숙 씨가 농촌여성신문을 읽고 공모전에 글을 쓴 것도 언니 김순옥 씨의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순옥 씨는 시골에서 낳고 자랐어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터라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했고 항상 어머니는 그런 딸을 옆에서 도우며 딸이 농사일에 익숙해지도록 도왔다. 어머니의 도움과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남편 덕에 지금은 132.000㎡(4만평)의 땅에 벼농사도 하고 서리태, 고추 등 밭작물까지 일구게 됐다. 귀농한 지 20년 다 되어가는 요즘 김순옥 씨는 아픈 손가락에서 든든한 손가락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농사짓는 딸이 밟혀 어머니는 수술한 두 다리도, 아픈 어깨도, 치매 증상도 아랑곳없이 버스로 20분 거리의 길을 수시로 오가신단다.

“최근에 엄마때문에 눈물지은 적이 있었어요” 무슨 얘길까 다가앉자, 휴대폰 안에 무엇인가 손수건에 반듯하게 쌓여 있는 사진을 먼저 보여주었다. 손주들이 대학 입학할 때쯤, 본인의 용돈을 모아 등록금에 보태라고 이렇게 주신다는 것이다. “이걸 받고서 한참 동안 맘이 짠해서 혼났어요. 이제 엄마를 위해 쓰고 사셔도 되시련만…” 이제는 본인을 위해 돈을 쓰라고 두 딸이 아무리성화해도 그 옛날 못 입히고 못 먹였던 게 한이 돼 자식들 주는 재미로 돈을 모으신단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남아계시길…  
팔순이 넘어 찾아온 치매도 어머니의 사랑은 이기지 못하는 듯, 잠시 주춤해졌다. 홀로 텃밭을 가꾸며 강아지들(어머니 건강하시라고 자식들이 강아지 이름을 건(健)이, 강(康)이라고 지었다)과 동네 친구분들과 재미나게 지내신다고 한다.
“욕심부리지 말그라! 천년만년 산다냐! 갈 때는 빈손이랑께! 엔간히 애들 쓰라잉!” 자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흡족하게 살고 있어서 좋으시겠다고 하자, 어머니 임오순 여사가 자식들에게 늘상 하는 말씀이라며 힘줘 말하셨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자식들에게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알려주고 싶으신 걸까.

김경숙 씨의 형제들은 이렇게 각자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한다. 살면서 누구나 힘든 시련은 있기 마련. “우리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더 속상해 하실까봐, 이겨내려고 하다 보니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 지더라고요.” 그 힘든 세월을 살아 온 어머니가 지금 이렇게 자식들의 주춧돌로 서 계시니 그 어떤 위로와 격려보다도 큰 힘이 됐다고.
“다행이 치매증상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지만, 그래도 완치는 없다니까 항상 걱정이에요. 지금처럼만 엄마가 우리들 옆에 오래오래 남아계신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흔히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누구나 마음속에 준비돼 있는 위인 한 두명쯤은 있을 것이다. 대부분 온갖 역경과 절망을 꿋꿋이 견뎌내 결국 꿈을 찾고 굵직한 결실을 맺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항상 ‘존경’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이들의 전기문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본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 과연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어떨까? 위인들처럼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을 위해 본인의 꿈을 접고 자식을 본인의 꿈으로 삼아 버팀목이 되기도 고난을 대신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김경숙 씨를 만나보고 더욱 더 ‘어머니’라는 이름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혹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짝사랑’이라고 하고,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자식 간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김경숙 씨 가족은 일찍 철 든 자식들의 사모곡에 든든히 멋진 답가를 해주시는 어머니가 계시니, 옆에서 절로 추임새가 나온다. “얼쑤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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